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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여성평화걷기] 민촌 이기영의 ‘고향’길 5 - ‘분텃골'

강승혁 전문 기자
  • 입력 2022.08.05 16:56
  • 수정 2022.08.07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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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량동 10대 성장지 ‘분텃골’
분텃골은 분토(粉土)가 나서 붙여진 이름
민촌 문학은 평등 세상 구현 위한 대장장이

<[2022 여성평화걷기] 민촌 이기영의 고향5 - ‘분텃골’>

 

(5) 분텃골(유량동 10대 성장지)

724일 오전 10시, 여성평화걷기 참가자들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 중암마을 표지석을 출발해 민촌 이기영의 중암마을(안서동) 집터를 눈으로 확인하고, 부모 묘소 터 가는 길 입구에서 이용길 회장의 설명을 들었으며, 소설 고향의 탄생지인 성불사에서 그가 머물렀던 흔적들을 느껴보았고, 중암마을 집에서 큰고모 집으로 이사가며 넘었을 쇠목 고개에 다다라 어려웠던 살림의 민촌을 상상해보았다. 이번 회는 민촌 이기영의 10대 성장지였던 분텃골을 다뤄본다.

 

이용길 회장은 "민촌 선생은 중암마을에서 쇠목 고개를 넘어 유량동의 큰고모 집으로 이사했는데 저 앞에 보이는 파란 지붕의 건물이 있는 터가 바로 그가 15세에 이사 와서 살던 집이 있던 곳“이라고 해설하며 "한국전쟁 이후 민촌의 큰고모 후손이 다시 건축했고 그 뒤쪽의 오래된 창고가 당시에도 있었던 것으로 흔적이 남아 있다"고 덧붙여 설명했다. / 사진 촬영=강승혁 전문 기자

 

분텃골은 분토(粉土)가 나서 붙여진 이름

이용길 회장(천안역사문화연구회)은 우산을 쓴 채로 마당이 넓은 한 주택 앞에서 민촌 선생은 중암마을에서 쇠목 고개를 넘어 유량동의 큰고모 집으로 이사했는데 저 앞에 보이는 파란 지붕의 건물이 있는 터가 바로 그가 15세에 이사 와서 살던 집이 있던 곳이라고 해설하며 "한국전쟁 이후 민촌의 큰고모 후손이 다시 건축했고 그 뒤쪽의 오래된 창고가 당시에도 있었던 것으로 흔적이 남아 있다"고 덧붙여 설명했다.

 

이어서 분텃골은 분토(粉土)가 나서 붙여진 이름으로 인조 때 학자 이승벽이 이곳에서 살면서 호를 분곡(盆谷)이라 하였다며 지명의 유래를 알려줬다. 또한 이기영이 15(1909)에 안서동 중암마을에서 이사 와서 살던 10대 성장지라고 말했다. 이어서 분텃골은 고향등의 작품에서 지주-소작 관계를 설정하는 이야기의 산실이었으며, 분텃골의 모습이 소설 두만강에 잘 묘사되어 있다고 작품 속의 장소를 소개했다. 그러며 이기영의 유량동 분텃골 집터의 주소는 유량동 269번지(천안시 동남구 태조산길 141-21)이다. 현재는 큰고모의 일가친척인 전주 이씨가 살고 있다고 덧붙여 설명했다.

 

참가자들이 민촌 이기영이 10대에 살았던 큰고모 집 앞에서 이용길 회장을 해설을 경청하고 있다. / 사진 촬영=강승혁 전문 기자
참가자들이 민촌 이기영이 10대에 살았던 큰고모 집 터 앞에서 이용길 회장의 해설을 경청하고 있다. / 사진 촬영=강승혁 전문 기자
비가 내리는 가운데 우산을 쓴 이용길 회장은 미소띤 얼굴로 "민촌이 10대에 살았던 큰고모 집이 있는 분텃골은 분토가 나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덧붙여 설명했다. / 사진 =강승혁 전문 기자
비가 내리는 가운데 우산을 쓴 이용길 회장은 미소띤 얼굴로 "민촌이 10대에 살았던 큰고모 집이 있던 분텃골은 분토가 나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덧붙여 설명했다. / 사진 =강승혁 전문 기자

 

민촌 문학은 평등 세상 구현 위한 대장장이

이용길 회장은 민촌은 단편 101, 중편 3, 장편 17, 희곡 5, 꽁트 1, 산문 228, 그리고 역사대하소설 두만강을 쓴 대작가이다. 이기영에 관한 논문이 1,200여 편이나 되는 문제작가다. 이기영의 소설에는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이란 두 모티브 즉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과 1930년대의 노동자와 농민을 주축으로 하고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 등장한다. 민촌의 작품에서 보이는 지주-마름-소작인이라는 3단계 착취구조는 오늘날 자본가-경영자-노동자로 변화했을 뿐 그 뼈대는 변하지 않아 보인다. 빈곤과 불평등의 현실과 이를 해결하려는 자유와 해방의 메시지는 오늘날의 과제이기도 하다고 강조하며 민촌 문학은 농촌의 자연과 민중의 삶과 투쟁을 통하여 사회적 차별이 사라진 평등세상 구현을 위한 대장장이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용길 회장의 해설과 안내로 중암마을 표지석을 출발→집 터→부모 묘소 터→성불사→쇠목 고개→분텃골로 이어진 〈민촌 이기영의 ‘고향’길〉 지도(5회 '분텃골'까지만 표시됐다) / 그래픽=강승혁 전문 기자

 

그가 성장했던 10대의 거주지 분텃골은 다음의 작품들에 언급되기도 하고 자세히 묘사되기도 했다.

 

고대 소설의 주인공은 대개 어려서는 극도의 간난고초를 겪다 우연히 도사(道師)를 만나서 공부를 잘하고, 출장입상(出將入相)해서 나중에는 일가를 중흥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지 않았던가? 나도 그와 같이 자기를 견주어 보며 감히 고대 영웅을 꿈꾸고 있었다.

부친은 집을 쫓겨나서, 할 수 없이 친척의 집 행랑 한 채를 치우고 산 넘어 이사를 갔다. 나는 그동안에 학교를 다니었으나, 집을 쫓겨날 무렵에는 일시 퇴학을 하였다가, 이사를 한 뒤에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 이기영, 나의 수업 시대,동아일보, 1937. 8. 7.

 

 

한내의 넓은 들판이 앞으로 펼쳐있고 뒤로는 노적봉이 솟아 있는 가코지는 지대가 드높은 산골짜기 속에 아늑하게 들어앉았다. 그 가운데 기름이 흐르는 기와집이 솟을대문을 다고 근감하게 벌려섰다. 그것은 묻지 않아도 안참령 집이다. 안참령 집은 이 터에서 십이 대를 살았는데, 언제 심었는지 모르는 능수버들숲은 고목이 되어서 동구 앞의 허전한 것을 둘러막았다.

- 이기영, , 풀빛, 1989, 187.

 

후원에는 넓은 장독대가 있고, 그 뒤 비탈진 언덕에는 대숲풀이 무성하게 울창하다. 바람이 불 적마다 푸른 댓잎이 우수수 흔들린다.

왼편 담 밑으로는 고목이 된 모과나무 한 주가 서있는데, 거기에는 뒴박만큼한 모과가 주렁주렁 열렸다. 실과는 누릇누릇하게 익어가며 향기를 풍기었다.

- 이기영, , 풀빛, 1989, 216.

 

한길주는 이 집을 ㄱ, ㄴ자 형으로 지었다. 안채는 ㄱ자로 안방 세칸, 마루방 여섯 칸, 부엌 한 칸과 건넌방 칸 반이다. 사랑채는 큰사람ㅇ이 마루까지 4, 작은 사랑이 두 칸과 큰 대문이 두 칸으로 되었다. 그리고 사랑채 부엌에서 연달아 마방과 광을 붙여 지었다.

안채 부엌 뒤에는 일자로 딴채를 세웠다. 그 방들은 노비와 침모, 차집들의 거처로 되었다. 후원에는 장독대가 놓였다. 모과나무, 감나무, 배나무, 은행나무 등의 큰 과목들이 서 있고, 비탈진 언덕에는 참대 수풀이 청청하게 우거졌다. 이 참대밭 위로는 높은 담장을 삥 둘러치고 기와로 담 위를 덮었다. 담장 뒤로는 바로 산이다. 산에는 큰 소나무들이 또한 울창하게 들어섰다.

마당 건너편은 언덕이 졌다. 이 언덕 가에 사철나무 울타리가 막아섰고 복숭아 살구 등의 과수와 수양버들의 늙은 고목이 그 안에 섰다. 그 밑은 낭떠러지로 된 옥녀봉 골짜기에서 한 줄기 석간수가 흘러나왔다.

- 이기영, 두만강1, 풀빛, 1989, 78.

 

- 6회 벌말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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