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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여성평화걷기] 민촌 이기영의 ‘고향’길 2 - ‘부모 묘소 터’

강승혁 전문 기자
  • 입력 2022.07.29 12:58
  • 수정 2022.07.29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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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암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곳 부모 묘소 터
소설 「봄」, 어머니 묘소를 배경으로 한 이기영의 어린 시절 잘 묘사

<[2022 여성평화걷기] 민촌 이기영의 고향2 - ‘부모 묘소 터’>

민촌 이기영의 부모 묘소 터를 관망할 수 있는 팔각정으로 가는 등산로 입구에서 이용길 회장이 "소설 「봄」에 어머니의 묘소를 배경으로 한 이기영의 어린 시절이 잘 묘사되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 사진 촬영=강승혁 전문 기자

 

(2) 부모 묘소 터(중암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곳)

민촌 이기영 선생은 11살의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며 큰 상실감과 우울증, 슬픔을 겪었던 것으로 그의 작품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그런 감정들이 민촌 이기영을 문학의 세계로 이끌었다는 것에, 민촌 이기영의 고향을 걸으며,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 속으로 돌아가 상상의 나래를 편다.

 

천안역사문화연구회 이용길 회장은 민촌 이기영 선생이 15세에 유량동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살았던 곳으로 추측되는 집터를 지나 부모 묘소 터와 중암마을이 내려다보이는 팔각정으로 가는 등산로 입구에서 참가자들이 모인 가운데 입을 열었다.

'민촌 이기영 선생의 고향길' 두번째 탐방지(부모 묘소 터 가는길 입구)에서 참가자들이 이용길 회장의 해설을 경청하고 있는 모습이다. / 사진 촬영=강승혁 전문 기자
'민촌 이기영 선생의 고향길' 두번째 탐방지(부모 묘소 터 가는길 입구)에서 참가자들이 이용길 회장의 해설을 경청하고 있는 모습이다. / 사진 촬영=강승혁 전문 기자

 

민촌 이기영 선생의 부모 묘소 터를 관망할 수 있는 등산로 입구에서 참가자들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 사진 촬영=강승혁 전문 기자
민촌 이기영 선생의 부모 묘소 터를 관망할 수 있는 등산로 입구에서 참가자들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 사진 촬영=강승혁 전문 기자

 

작품의 무대인 천안에서 민촌을 기억하는 일은 흔하지 않아

그는 민촌 선생이 스스로 고향이라고 하였고 많은 작품의 무대인 천안에서 민촌을 기억하는 일은 흔하지 않다. 민촌 백일장이 열리고 민촌 평전이 출판되기도 했지만 이렇다 할 추모사업이나 기념사업도 진행되지 않고 있다고 밝히며 충북 진천에서 조명희 선생을 기념하는 포석문학관이나, 괴산에서 벽초 홍명희 선생을 기념하는 홍명희문학비나, 옥천에서 정지용 시인을 기념하는 정지용문학관을 보더라도 민촌 선생은 고향인 천안에서 잊혀진 느낌이다. 농민소설의 대가요, 사실주의 작가의 최고봉이요,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올랐으며 태백산맥의 조정래 선생이나 토지의 박경리 선생에 버금가는 대문호 민촌 이기영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도 드믈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이어서 그는 그러나 천안은 민촌의 생애와 작품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며 이기영의 고향, 천안에 대한 애향심을 나타냈다.

 

소설 , 어머니 묘소를 배경으로 한 이기영의 어린 시절 잘 묘사

이용길 회장은 부모 묘소 터와 중암마을을 내려다볼 수 있는 팔각정으로 가는 등산로 입구에서, 우천으로 인한 산길 등반은 위험할 수 있다며 팔각정까지의 산길 걷기는 다음으로 미루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해설을 이어갔다.

 

뒤에 보시는 이 등산로를 따라가면 천안 시내를 멀리 내다볼 수 있는 팔각정이 있다. 거기서 샛길로 접어 들어가면 중암마을을 내려다보는 언덕에 이기영의 부모 묘소 터가 있다

 

이기영이 11(1905) 때 모친인 밀양 박씨가 37세로 사망하여 묘를 조성하였고, 부친이, 이기영이 24(1918) 때, 46세로 사망하자 합장하였다. 몇 년 전 이기영의 장손자가 이장하여 터만 남아 있다. 소설 봄에 어머니의 묘소를 배경으로 한 이기영의 어린 시절이 잘 묘사되어 있다

 

민촌 이기영 선생의 사진 / 출처=나무위키
민촌 이기영 선생의 사진 / 출처=나무위키

 

민촌 이기영은 어머님 상을 치르고 상실감과 우울함, 허전함, 슬픔에 빠졌는데, 그런 감정들이 그의 작품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그는 문장19402월호 문학을 하게 된 동기라는 글에서 이에 대한 사실 묘사와 심정을 밝혔다.

 

내가 만일 모친상을 일찍 당하지 않았던들 나는 그때 이야기책을 탐독하지도 않았을 것이오. 따라서 문학과는 인연이 멀어졌을는지도 모른다.

나는 열한 살 먹던 해 봄에 모친상을 당했었는데, 그 뒤로는 어쩐지 세상이 달라진 것 같은 일변한 나의 주위가 몹시 쓸쓸해져서, 나는 갑자기 구름 속에 든 태양 같은, 늘 그늘지고 실심한 기분 속에 그날 그날을 살게 되었다.

내가 어려서 모친상을 당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우리 집 환경에도 그 전보다 다를 것이 없을 것이요.따라서 나에게도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커다란 변동이 없었을 터이니까, 내가 이야기책 속으로 뛰어든 것은 오로지 모친상을 당했기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나는 모친상으로 말미암아 문학에 투신했다고, 그것을 슬퍼하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다. 나는 도리어 그렇다면 모친에게 감사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나는 비록 지금까지 실()답지 못한 문학을 한답시고 고향을 등지고 있는 것이 불효하기 짝이 없으나, 그러나 내가 만일 지금까지 모친의 슬하에서 자라났다면 나는 더한층 불효를 하고 어떤 부류의 인간이 되었을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기영, 문학을 하게 된 동기, 문장, 19402월호, 1940.)

 

 

민촌 이기영 선생은 당시 우울한 심정을 193786, 동아일보에 실렸던 나의 수업 시대라는 글과 자신의 자전적 소설 에서도 드러냈다.

 

일조(一朝)에 사랑하는 어머니를 여윈 뒤로는 나는 자기도 모르게 우울한 성격을 이루어 갔다.

모친은 바로 건너다 보이는 안산에다 묘를 썼다. 나는 조석으로 산소를 바라보며 모친을 생각하였다. 밤에 자면서 남모르게 베개를 적신 적도 많았다. (이기영, 나의 수업 시대, 동아일보, 1937. 8. 6.)

 

무덤 위에도 새싹은 파릇파릇 돋아난다. 낮에는 해가 비치고 밤이면 어둠이 둘러싸이긴 인간과 다름이 없건마는 저 세계는 어찌하여 생명이 없고 통할 길이 없다는가. 이를 일러 유명(幽明)이 다르다 함인가. 자고 깨면 그는 먼저 안산이 건너다보였다. 세 무덤의 고총(古塚)이 나란히 묻힌 옆으로 모친의 새로 쓴 산소가 쓸쓸하게 홀로 묻혔다. (이기영, , 18~19, 1989.)

 

- 3회 성불사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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