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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여성평화걷기] 민촌 이기영의 ‘고향’길 1 - 중암마을

강승혁 전문 기자
  • 입력 2022.07.27 18:03
  • 수정 2022.07.28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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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의 어린 시절 성장지 중암마을

<[2022 여성평화걷기] 민촌 이기영의 고향1>

중암마을 표지석 앞에서 '민촌 이기영'의 '고향'길에 대해 설명하는 이용길 회장(천안역사문화연구회). / 사진 촬영=강승혁 전문 기자

 

‘2022 여성평화걷기 대행진4월 여수광양을 시작해 5월 군산전주 구간에 이어 지난 723, 24일 아산 천안 구간을 걸었다. 24일 천안 구간은 안서동 중암마을 표지석 앞에 집결해 진행됐는데, 천안 역사문화연구회 이용길 대표의 안내와 해설을 들으며 독립운동가, 월북 작가인 민촌 이기영선생이 나고 자란 고향길을 걸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민촌 이기영의 고향을 답사한 행진단의 일원이었던 필자는 민촌 이기영의 고향의 돌아본 곳을 7회에 걸쳐 게재한다. 민촌 이기영의 어린 시절 성장지인 「중암마을」, 중암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곳 <부모 묘소 터>, 농촌 리얼리즘 소설 『고향의 탄생지인 <성불사>, 안서동과 유량동의 교통로인 <쇠목 고개>, 유량동 10대 성장지인 <분텃골>, 방랑과 정착지 <벌말>, 단편소설 민촌의 배경인 <향교말> 순이다.

 

 

고향은 이기영 선생의 고향마을이고 농민소설의 백미인 장편소설 고향의 제목

민촌 이기영의 고향을 찾아내고 매월 셋째 주 토요일 도보 탐방을 진행하고 있는 천안역사문화연구회의 이용길 회장은 민촌 이기영의 고향은 천안 안서동과 유량동을 잇는 산길과 오솔길을 따라 선생의 발자취와 작품에 등장하는 마을과 냇물과 산자락을 이어서 걷는 길이라고 설명하고 “’고향은 선생이 마음으로 그리워하던 고향마을이고 농민소설의 백미인 장편소설 고향의 제목이라고 덧붙였다.

 

이어서 그는 원래는 8킬로미터 정도의 오르내리는 구간을 3시간가량 걸어야 하는데 비도 오고, 점심시간까지의 시간제한과 걷기 힘든 어르신도 계시고 하여 일부 구간은 차량으로 이동하고 2시간 이내로 단축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이용길 회장은 민촌이 서너살부터 살았던 중암마을에서 출발하여 자전적 소설 의 무대인 부모묘소터를 돌아 농민문학의 금자탑인 장편소설 고향40일 만에 탈고한 천년고찰 성불사를 들렀다가 안서동을 떠나 유량동으로 넘어가는 쇠목고개를 넘어서 두만강의 무대이고 소년 시절을 보낸 분텃골에서 방황의 청년기를 보낸 벌말로 갔다가 단편 민촌의 무대이고 작가로 등단하기 전까지 살았던 향교말에 이르는 20여 리를 산 따라 물 따라 걷는 길이라고 전체 탐방 길을 머릿속에 그려줬다.

 

민촌 이기영 선생이 생전에 집필중인 모습. / 사진 출처=천안역사문화연구회
생전에 '민촌 이기영' 선생이 집필중인 모습. / 사진 출처=천안역사문화연구회

 

민촌 이기영은 충남 아산 출신의 월북작가로 전 문예총 위원장

 

이기영은 어떤 사람일까.

 

이기영은 충남 아산 출신의 월북작가로 전 문예총 위원장이었다. 필명은 민촌(民村)이며 1904년 어머니 사망 후 1907년 사립영진학교에 입학, 1910년에 졸업했다. 1918년에는 논산 영화여자고등학교에서 교원생활도 했다.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영어정치학교를 고학으로 다녔다. 이 시기 그는 문학을 통해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한 것으로 알려졌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귀국한 뒤 창작에 몰두, 1924'개벽' 창간 4주년기념 현상작품모집에 단편소설 '오빠의 비밀편지'가 당선됐다. 1945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연맹의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1946년 월북 후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했다. 월북 전의 작품 활동을 보면 단편소설 90여 편, 단행본 14, 희곡 3, 평론 40여 편에 달한다. 이기영은 1984년 향년 90세로 사망할 때까지 북한문단의 중심에서 꾸준히 창작을 한 작가였다. 1972년 이후 사망 당시까지 북한의 문화예술총동맹(문예총) 위원장이기도 했다. 그는 현재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능에 묻혀있다” (동규, 이재명이 리종혁에게 선물한 '아버지 흔적'"많이 고맙소, 노컷뉴스, 2018.11.17.)

 

민촌 이기영의 고향은 이용길 회장의 해설과 안내서를 참고해 작성했다.

 

중암마을 표지석에 서있는 '민촌 이기영의 고향길' 안내문 옆에서 권영길 이사장(평화철도)이 앉아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사진 촬영=강승혁 전문 기자
민촌 이기영 '고향'길을 해설중인 이용길 회장이 표지석 뒷면을 가리키며 '중암마을' 표지석이 2003년 12월 이재규 선생이 기증한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 사진 촬영=강승혁 전문 기자

 

(1) 중암마을(어린 시절 성장지)

이용길 회장은 중암마을은 1895년 배방읍 화룡리에서 태어난 이기영이 서너 살 때 이사와서 15(1909)에 유량동으로 이사 가기 전까지 살았던 마을로 집터는 안서동 311번지로 추정된다고 설명하고 소설 고향의 주 무대이고 이후의 작품들 속에서도 작품 배경의 원형이 된다. 표지석과 안내판이 있다고 말했다.

 

이기영은 193786일 동아일보에 게재했던 나의수업시대에서 이 시절을 묘사했다.

 

천안, 직산이라면 메마르기로 유명한 땅인데, 나는 그중에서도 더욱 유명한 천안 뒤뜰에서 살았다. 내가 살던 고향도 지금은 천안군 안서리로 되었지만, 그때는 북일면 상, , 하엄리였었는데, 우리 집은 바로 중엄리에 있었다

원래 나의 출생지는 천안이 아니다 그것은 구 온양군 남곡이었는데 내가 서너살 적에 천안으로 옮기었다 한다. 천안에는 친척이 살고, 그의 토지가 엄리에 있음으로, 우리 집은 그 집 땅을 치기 위해서, 말하자면 생활의 방편을 구해간 모양이었다., , 하엄리는 모두 민촌이었다 명색 토반(쟁퉁이)이라고, 두어집 있었으나 그들도 영세한 소작농 생활을 하기 때문에 상민들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근 백 호 되는 세 돌리에 기와집이라고는 볼 수 없고 제 땅 마지기를 가지고 추수해 먹는 집이 없었다. (이기영, 나의 수업시대, 동아일보, 1937. 8. 6.)

 

또한 1939325일과 동년 330일 동아일보에 실었던 내 문학을 길러준 곳-교박한 천안뜰 뒤라는 글에서도 이 시기에 대해 썼다.

 

내가 살던 곳은 바로 중엄리였다. 이 통 안에서 상, , 하엄리가 그 중 터전이 넓다 하겠는데 그래도 앞뒤로 산이 막히고 개울이 흘러서 전토(田土)라고는 불과 몇 석 지기가 안 되었다. 그나마 천수답이 많고 산속으로 들어박힌 논다랑이는 그야말로 눈깔 만큼씩 한 찬물받이였다.

그러고 보니 주민의 생활은 불문가지였다. , , 하엄리의 3동을 합하여도 불과 100호 미만의 호수(戶首)가 생계는 농업인데 농토가 부족하여 그때도 개와(蓋瓦)집 한 채를 볼 수 없는 가난뱅이들이 삼간 두옥의 초막 신세를 지고 살던 것이었다. 상엄리에서 뒷고개를 넘으면 유왕골이라는 고산지대다. 거기기는 여름에도 매미 소리를 못 듣는다는 본격적 산중이다.

거기 사람들은 대부분 숯을 굽거나 짚신을 삼아서 천안 장에다 파는 것이 유일한 생업이었다. 그러나 엄리 사람들은 그런 벌이도 여의치 않아서 농업의 다음으로는 나무 장사를 하는 것이 부업이었다.

따라서 사는 것들이 오죽지 못해서 동리는 해마다 퇴락해가는데 그래도 죽지는 말라는 법인지 교박한 땅에서 새로운 이득을 파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금광이었다. ······

하엄리의 냇가에서부터 시굴하던 것을 나중에는 이 통안-, , 하엄리와 무네미 신촌(新村)의 두 계류(溪流) 연도(沿道)의 전답까지 금이 잘 나는 데는 모조리 팠다. 텃논 텃밭은 물론 집을 헐기까지 하고 금구덩이를 파 들어갔다. 그렇게 읍내까지 파먹었다.

이 동리에서 사금광의 발견은 아마 역사 이래로 전무후무한 황금시대라 할 것이었다. 한참 재벽(노다지와 노다지 같은)이 쏟아져 나올 무렵에는 연상 덕대와 금전꾼들이 모여들어서 하엄리는 가게 집들이 즐비하게 들어앉고 거기에 따라서 남사당패 걸립패 연락 난장 등의 흥행물이 떠나지 않아서 그들은 금전꾼의 부듯한 주머니를 노리었던 것이다.

내가 수년 전에 이곳을 오래간만에 다시 가보니 옛날 살던 때와는 생판으로 면목이 달라졌다. 그때는 사금만 했었는데 근년에는 석금까지 쏟아져서 좌우의 산록을 벌집처럼 숭숭 굴을 뚫어놓았다. 그리고 천변과 천변으로 연한 전답은 하나도 성한 것이 없었다. 모두 금점을 파먹은 구덩이와 흙저 버력을 쌓아놓은 것 뿐인데 그것도 한 번만 파먹은 것이 아니다. 실로 여러 번을 뒤집고 뒤집어서 이 잡듯 서캐 잡듯 금을 뒤져먹은 형적(形跡)이 완연한데 마치 두더지가 쑤시고 달아난 밭고랑 같다 할까? 동리의 미관으로 보아서는 여간 살풍경이 아닌 사력천지(砂礫天地)였다. (이기영, 내 문학을 길러준 곳-교박한 천안뜰 뒤, 동아일보, 1939.3.25./3.30.)

- 다음회(중암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부모묘소 터)로 이어집니다.

민촌 이기영의 '고향'길 걷기에 앞서 참가자들이 이용길 회장의  구령에 맞춰 가볍게 몸을 풀고 있는모습. / 사진 촬영=강승혁 전문 기자
민촌 이기영의 '고향'길 걷기에 앞서 참가자들이 중암마을 입구에서 이용길 회장의 구령에 맞춰 가볍게 몸을 풀고 있는 모습. / 사진 촬영=강승혁 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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