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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여성평화걷기] 민촌 이기영의 ‘고향’길 4 - ‘쇠목 고개’

강승혁 전문 기자
  • 입력 2022.08.03 10:17
  • 수정 2022.08.03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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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서동과 유량동의 교통로 ‘쇠목 고개’
일제강점기에 쓴 민촌 작품과 민촌이 해방된 조국에서 금기시된 것이 우리 현대사의 비극

<[2022 여성평화걷기] 민촌 이기영의 고향4 - ‘쇠목 고개’>

 

이용길 회장의 해설과 안내로 중암마을 표지석을 출발→집 터→부모 묘소 터→성불사→쇠목 고개로 이어진 〈민촌 이기영의 ‘고향’길〉지도. / 그래픽=강승혁 전문 기자
이용길 회장의 해설과 안내로 중암마을 표지석을 출발→집 터→부모 묘소 터→성불사→쇠목 고개로 이어진 〈민촌 이기영의 ‘고향’길〉 지도(4회 쇠목 고개까지만 표시됐다) / 그래픽=강승혁 전문 기자

 

(4) 쇠목 고개(안서동과 유량동의 교통로)

 

이용길 회장(천안역사문화연구회)은 차량으로 이동하며 쇠목 고개 인근에서 주차할 곳을 찾느라 정차와 서행을 했다. 하지만 마땅히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하고 다음 코스로 이동해 설명을 이어갔다.

 

일제강점기에 쓴 민촌 작품과 민촌이 해방된 조국에서 금기시된 것이 우리 현대사의 비극

민촌 이기영 선생은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과 동시에 남북으로 분단된 질곡의 근현대역사를 사실주의 사회주의 작가로 살았다. 일제강점기의 혹독한 탄압과 가혹한 검열의 고통 속에서도 역작을 남겼다. 일제강점기의 혹독한 탄압에도 창씨개명을 하지않았고 수많은 문인이 숙청되었던 북한 체제 속에서도 평생을 작품활동을 펼친 불굴의 의지로 일관한 작가다. 그러나 해방 후 남한에서는 오랜 세월을 철저하게 유폐된 채 이름을 부르지도 못하고 작품을 읽지도 못했다. 해방된 조국에서, 일제강점기에 쓴 민촌의 작품들과 민촌 이기영이 금기시된 것은 바로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라 할 것이다

 

”1988년에 월북작가들의 작품이 해금되었지만 이기영, 홍명희, 한설야 등 5인의 작품은 제외되었고 그 후에도 오랜 기간을 갇혀있었다. 민족민중문화예술은 식민지배체제보다 더한 남북분단체제의 엄격한 지배 속에 놓여있었다. 일제 식민지 시대의 가혹한 검열을 통과했던 작품들을 분단 시대의 권력자들이 금지시켜버렸으니 식민통치자들의 검열보다 오히려 더 졸렬한 문화예술정책을 유지해왔던 것이다

 

안서동과 유량동의 교통로인 '쇠목 고개', 지금은 구름다리가 설치되어 있다. / 사진=카카오 로드뷰
안서동과 유량동의 교통로인 '쇠목 고개', 지금은 구름다리가 설치되어 있다. / 사진=카카오 로드뷰
쇠목 고개는 왕자산을 소의 머리로 보고, 태조봉을 소의 몸통으로 볼 때, 소의 목에 해당한다 하여 '쇠목 고개'라 전해진다고 한다. / 그래픽=강승혁 전문 기자
쇠목 고개는 왕자산을 소의 머리로 보고, 태조봉을 소의 몸통으로 볼 때, 소의 목에 해당한다 하여 '쇠목 고개'라 전해진다고 한다. / 그래픽=강승혁 전문 기자

 

이용길 회장은 ”(쇠목 고개는) 지금 주로 차량이 통행하고 있으며, 그 위에 1997년 태조산 구름다리가 설치되었다. 쇠목 고개는 태조봉을 소의 몸으로 보고 왕자산을 소의 머리로 보았들 때 지금의 고갯길이 소의 목 부분에 해당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안서동 호서대학교에서 유량동 충청소방학교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안서동과 유량동을 연결하는 1.3km이 유안 터널이 20225월 준공 예정으로 공사 중이라고 차분하게 설명했다.

 

또한 민촌 이기영은 15(1909)에 이 고개를 넘어 14세에 결혼한 두 살 많은 부인 한양 조씨 조병기, 조모와 함께 안서동 중암리에서 유량동 분텃골 큰고모네 사랑채로 이사하였다고 말했다.

 

민촌 이기영은 193787일 동아일보에 게재한 나의 수업 시대란 제목의 글에서 쇠목 고개를 넘던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고대 소설의 주인공은 대개 어려서는 극도의 간난고초를 겪다 우연히 도사(道師)를 만나서 공부를 잘하고, 출장입상(出將入相)해서 나중에는 일가를 중흥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지 않았던가? 나도 그와 같이 자기를 견주어 보며 감히 고대 영웅을 꿈꾸고 있었다.

부친은 집을 쫓겨나서, 할 수 없이 친척의 집 행랑 한 채를 치우고 산 넘어 이사를 갔다. 나는 그동안에 학교를 다니었으나, 집을 쫓겨날 무렵에는 일시 퇴학을 하였다가, 이사를 한 뒤에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 이기영, 나의 수업 시대,동아일보, 1937. 8. 7.

 

- 5회 분텃골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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