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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 비문에 나오는 [396년 백제 정벌 식민지화] 기록이 [삼국사기]에는 없다. 왜? 코리아의 역사를 차이나 대륙에서 지워라. 코리아 한자漢字 (11) 일본을 편드는 국사편찬위원회 (115)

이원환 전문 기자
  • 입력 2023.12.31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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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개토왕 비문 396년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 부분에 대한 위조·변조 논란은 아직까지는 없다. [잔국殘國]이 [백제]라고 보는 데에도 이견이 없다.

 

바로 이전의 395년조 기록에 대한 위조·변조 논란은 매우 심각하다. 일본 제국주의는 비석을 훼손하여 위조·변조하였고 지금까지도 일제가 아닌 일본은 위조·변조하지 않았다고 우기고 있다.

 

2. 삼국사기 기준 고구려 19대 왕 광개토왕 6년, 기원후 396년에 광개토왕은 [殘國=백제] 정벌에 나섰다. 以 六年 丙申 王 躬率 水軍 討伐 殘國

 

1) 이때 58개 성, 7백개 촌을 얻었고, [잔주殘主= 백제왕]의 동생과 대신 10인을 데리고 도성으로 개선했다. 於是 得 五十八城 村七百 將 殘主 弟 幷 大臣 十人 旋師 還都.

 

2) [잔殘=백제]는 의(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전투에 나섰다. 왕이 매우 노하여 아리수阿利水를 건너 군사를 보내 성을 공격하였고, (백제 군사가) 소굴로 도망쳐,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잔주殘主=백제왕]이 곤핍(困逼)해져 남녀 생구(포로) 1천 명과 세포(細布) 1천 필을 바쳐 항복하고 스스로 "이제부터 영원토록 노객(신하)이 되겠습니다."라고 맹세하였다. 殘不服義 敢出百戰. 王威赫怒 渡 阿利水 遣刺 迫城 □□歸穴□便圍城. 而 殘主 困逼 獻出 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王自誓. "從今以後 永爲奴客."

 

3) 백제 왕성과 58개 성이 함락되었고, 백제왕이 충성 맹세를 하고, 백제왕의 동생과 대신 10명이 인질로 고구려에 끌려갔으면 백제는 사실상 망한 것이나 다름 없다.

 

당연히 이 기록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백제본기 혹은 신라본기 혹은 차이나 역사서에 조금이라도 기록이 남아 있어야 한다.

 

3.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조에는 [396년 백제 정벌 식민지화] 기록이 없다. 즉위년인 392년부터 395년까지 백제와의 전쟁 기록이 90% 이상이다. 395년 패수(浿水) 강가에서 백제를 대파하고 난 뒤 아예 4년간 기록이 없고, 400년에 고구려가 후연에 조공한 기록이 나온다. 광개토왕 비문에 나오는 [396년 백제 정벌 식민지화] 기록은 없다. (부록 참조)

 

고구려 본기를 읽어 보면 광개토왕이나 장수왕이 차이나에 조공한 기록이 많이 나온다. 이는 코리아 국민들이 교과서로 배운 것과는 차이가 매우 크다.

 

광개토왕 비문에 나오는 [396년 백제 정벌 식민지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고, 광개토왕 비문에 나오는 다른 정복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으며, 도리어 차이나에 조공한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온다.

 

이것이 바로 [코리아조선] 혹은 [일제] 혹은 [둘 다]에 의해 코리아 역사가 왜곡되었다는 증거인 것이다.

 

4. 백제 아신왕은 392년 즉위했다. 광개토왕과 즉위한 해가 같다. 아신왕은 한성漢城 별궁에서 태어났는데 차이나 역사책 [신당서]는 고구려의 3개 서울 중 하나가 한성漢城이라고 했다. 阿莘王 (或云 阿芳.,) 枕流王之元子. 初生 於 漢城别宫, 神光炤夜.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조]에 나오는 관미성 전투나 395년의 패수 강가에서 대패 기록은 [백제본기]에도 있다. 그러나 [396년 백제 정벌 식민지화] 기록은 없다. 아예 396년 기록 자체가 없다. 이후 백제가 고구려에 복수할려고 노력했다는 기록만 있고 403년에 신라를 침공한 기록만 있다. (부록2)

 

5. 삼국사기 편찬자가 [396년 백제 정벌 식민지화] 기록을 몰라서 기록하지 않았을 수는 있어도, 알면서 기록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392년 관미성 전투, 395년 패수 강가 전투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396년 백제 정벌 식민지화] 기록을 [코리아 조선]이 삭제했건, [일제]가 삭제했건 둘 중 하나이다. 광개토왕이 함락시킨 백제 왕성과 58개 성은 거의 백제의 모든 영역이다. 이 엄청난 사건을 기록하지 않았을 리 없다.

 

전해오는 대로 백제가 고구려에서 나와서 건국한 고구려와 형제국가가 아니었다면, 396년에 백제의 이름은 역사책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부록1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1) 〔즉위년(392)〕 가을 7월에 남쪽으로 백제를 쳐서 10개 성(城)을 빼앗았다. 秋七月, 南伐 百濟, 拔十城.

2) 〔즉위년(392)〕 겨울 10월에 백제의 관미성(關彌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그 성은 사면이 가파른 절벽이며 바닷물로 둘러싸여 있다. 왕이 군대를 일곱 길로 나누어 20일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冬十月, 攻䧟 百濟 關彌城. 其城 四面 峭絶, 海水 環繞, 王分 軍 七道, 攻撃 二十日, 乃拔.

3) 2년(393) 가을 8월에 백제가 남쪽 변경을 침범하니 장수에게 명하여 이를 막게 하였다 二年, 秋八月, 百濟侵南邉, 命将拒之.

4) 3년(394) 가을 7월에 백제가 침공해오니 왕이 정예기병 5,000명을 거느리고 맞받아쳐서 패배시켰다. 살아남은 적들이 밤에 달아났다.三年, 秋七月, 百濟来侵, 王率精騎五千, 逆撃敗之. 餘寇夜走

5) 〔3년(394)〕 8월에 나라 남쪽에 일곱 개의 성을 쌓아 백제의 침공에 대비하였다 八月, 築 國南 七城, 以備 百濟之寇.

6) 4년(395) 가을 8월에 왕이 패수(浿水) 가에서 백제와 싸워 크게 패배시키고 8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四年, 秋八月, 王 與百濟 戰 於浿水之上, 大敗之, 虜獲 八千餘級.

7) 9년(400) 봄 정월에 왕이 사신을 보내 〔후〕연[燕]에 가서 조공하였다 九年, 春正月, 王遣使入燕朝貢.

 

부록2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신왕

1) 2년(393) 봄 정월에 동명(東明)의 사당을 배알하였다. 또 남쪽 제단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지냈다. 二年, 春正月, 謁東明廟. 又祭天地於南壇.

2) 〔2년(393)〕 가을 8월에 왕이 진무(眞武)에게 말하기를, “관미성(關彌城)은 우리나라 북쪽 변경의 요충지이다. 지금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으니, 이는 과인이 분하고 애석하게 여기는 것이다. 경은 마땅히 마음을 써서 치욕을 갚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군사 10,000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칠 것을 도모하였다.秋八月, 王謂武曰, “關彌城者, 我北鄙之襟要也. 今爲髙句麗所有, 此 寡人之 所 痛惜. 而 卿之所冝用心, 而 雪恥也.” 遂謀 將兵一萬, 伐 髙句麗 南鄙.

3) 3년(394) 봄 2월에 맏아들 전지(腆支)를 태자로 삼고, 크게 사면하였다. 三年, 春二月, 立元子腆支爲太子, 大赦. 拜庶弟洪爲内臣佐平.

4) 〔3년(394)〕 가을 7월에 고구려와 수곡성(水谷城) 아래에서 싸워 패하였다. 秋七月, 與髙句麗 戰於 水谷城下, 敗績.

5) 〔3년(394)〕 태백(太白)이 낮에 나타났다.大白晝見.

6) 4년(395) 봄 2월에 혜성[星孛]이 서북쪽에 나타났다가 20일 만에 사라졌다. 四年, 春二月, 星孛于西北, 二十日而滅.

7) 〔4년(395)〕 가을 8월에 왕이 좌장(左將) 진무(眞武)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고구려왕 담덕(談德)이 몸소 군사 7,000명을 이끌고 패수(浿水) 가에 진을 치고 막아 싸웠는데,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해 죽은 자가 8,000명이었다. 秋八月, 王命左將真武等, 伐髙句麗, 麗王談徳親帥兵七千, 陣於浿水之上拒戰, 我軍大敗死者八千人.

8) 〔4년(395)〕 겨울 11월에 왕이 패수(浿水) 전투〔의 패배〕를 보복하기 위하여, 직접 군사 7,000명을 이끌고 한수(漢水)를 건너 청목령(靑木嶺)아래에 진을 쳤다. 마침 큰 눈을 만나 군사들이 많이 얼어 죽자 군대를 돌려 한산성(漢山城)에 이르러 군사들을 위로하였다. 冬十一月, 王欲報浿水之役, 親帥兵七千人, 過漢水次於青木嶺下. 㑹大雪, 士卒多凍死, 迴軍至漢山城, 勞軍士

9) 6년(397) 여름 5월에 왕이 왜국(倭國)과 우호 관계를 맺고 태자 전지(腆支)를 볼모로 보냈다. 六年, 夏五月, 王與倭國結好, 以太子腆支爲質.

10) 〔6년(397)〕 가을 7월에 한수(漢水) 남쪽에서 크게 사열하였다. 秋七月, 大閱於漢水之南.

11) 〔7년(398)〕 가을 8월에 왕이 고구려를 치기 위하여 군사를 내어 한산 북쪽의 목책에 이르렀다. 그날 밤에 큰 별이 군영 내에 떨어졌는데 큰 소리가 났다. 왕이 매우 꺼려하여 곧 〔정벌을〕 그만 두었다. 秋八月, 王將伐髙句麗, 出帥至漢山北柵. 其夜大星落營中有聲. 王深惡之, 乃止.

12) 8년(399) 가을 8월에 왕이 고구려를 공격하려고 군사와 말을 크게 징발하였다. 백성들이 전역(戰役)에 시달려 많은 사람들이 신라로 도망치니 호구(戶口)가 줄어들었다. 八年, 秋八月, 王欲侵髙句麗, 大徴兵馬. 民苦於役, 多奔新羅, 戶口衰滅

13) 〔12년(403)〕 가을 7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쳤다. 秋七月, 遣兵侵新羅邊境.

유튜브 '관미성', 대륙 백제의 증거? 에서 캡쳐
유튜브 '관미성', 대륙 백제의 증거? 에서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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