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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다윤 시인의 블루 칸타빌레

김정은 전문 기자
  • 입력 2023.12.27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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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별이 된 고인을 추모하며

 

박다윤 작가는 1971년 12월 태어나 올해 암 4기로 하늘의 별이 되었다. 기독교 신학을 전공하고 2000년도에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하고 이화여대 논술철학과 음악치료 전문과 과정을 수료한다.

2007 계간 아세아 문학 여름호 등단과 동시에 시부분 신인상을 수상한다. 잡지사 및 사보 기자를 하며 수많은 명사들을 인터뷰하고 2013년 노천명 문학상 수상, 2014년 첫 시집 은빛 소나타를 출간한다. 도서출판 다경 대표이며 한국파마제약 홍보실 사보팀 편집국장으로 일하다 소천한다. 은빛 소나타 시집도 아름다운 정서를 가진 시집이다. 필자와는 독일 하노버 국제 한국 시화 전시회를 같이 한 지인이다. 맑았던 모습에 가슴 아프다.

할머니의 정이 눈이 된 연상도 좋고 할아버지가 인생 시를 지핀다는 표현력도 좋다. 영원히 자유로운 보헤미안이 되었다.

 

할머니의 인심

 

한티역 5번 출구 앞

도곡 재래시장 입구에는

아침부터 버스에서

시달려온 올망졸망한

고추, 양파, 상추, 시금치가

아직 잠이 덜깬 얼굴로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푸성귀를 다듬는

할머니의 손 마디, 마디에는

세월의 자국이

군데군데 굳은살로 박혀있고

손바닥은 오랜 시간에 아픔처럼 지워졌는지

손금이 없다

 

장사가 예전같지 않아도

기어코 덤으로

나물들을 한 움큼 더 집어준다

할머니의 후덕한 인심에 반해

콩나물 한 단 더 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할머니의 인심처럼

포근한

눈이 내린다.

 

할아버지의 시

 

할아버지는 오늘도 불을 지피고 계셨다

 

불이 붙지 않는 장작 위에

살아온 세월과 한숨이

작은 통나무 위로

침묵과 함계 내려앉는다

 

한동안의 침묵이

뒷산의 뻐꾸기 소리와 함께

뒤엉켜

새로운 시를 만들어냈다

 

새로운 시가

녹초 되어 지친 여름 햇살을

보드라이 쓰다듬는다

 

할아버지는 시에 불을 지피고 계셨던 것이다

 

집시

 

체코 프라하 카를대교에서 마주친

그 조각 같은 얼굴의

집시 한 무리는

가슴을 엘 듯한

서러운 곡조를 뿜어내면서

나의 마음을 은사시나무처럼

흔들고 있었다

 

자유분방한 방랑 기질

노래하는 고독한 이방인

보헤미안인의 오래된 숙명이

발길을 붙잡고 있었다

 

그들의 노래에 취해있는

관광객들 사이를 비집고

소리 없이 돈이 털리기 시작했다

집시들은 자리를 뜨면서

노을빛 속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문득

주머니를 만져보았다

‘내 돈은 무사하다’는 안도감이

집시가 되고 싶은 생각을 고쳤다

 

관광객의 돈을 터는

집시가 아닌

보헤미안의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이방인으로 남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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