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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두칠성의 정기를 받은 나라의 제사장이시고 (國岡上), 영토을 넓히고 개척하신(廣開土境), [평안平安] 지역 출신이신, 매우매우 위대한 (好太) 왕 = 광개토대왕“. 코리아 한자漢字 (9) 일본을 편드는 국사편찬위원회 (113)

이원환 전문 기자
  • 입력 2023.12.18 07:17
  • 수정 2023.12.18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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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동군河東郡]에 [평양平陽현], [천수군天水郡]에 [평양平襄현]이 있다. [천승군千乘郡]에 [평안平安] 현이 있는데 이름이 같은 [평안平安] 현이 [광릉국廣陵國]에도 있다. 한반도에 평안平安남도와 평안平安북도가 있다.

 

고구려는 5씨(부)족으로 구성되었다고 역사책은 전한다. 더 많은 씨(부)족들의 연맹체, 즉 연방인데 그 중 강력한 씨(부)족만 기록한 것이다. 4씨(부)족도 되고 6씨(부)족도 되는데 굳이 5씨(부)족으로 한 이유는 무엇일까? 5씨(부)족은 각자의 근거지인 서울이 있었다. 5씨(부)족 중 4 곳에 [노奴]가 붙는다. 연(소)·절·순·관노이다.

 

고구려 관등에는 [가加]가 붙는다. 상가·고추가·대가 이다. 부여의 관등은 6단계이며 가축의 이름 뒤에 [가加]를 붙였다. 以 六畜 名 官,有 馬加、牛加、狗加,其邑落 皆主屬 諸加。(후한서 부여전) 이를 6부족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가加] 는 우두머리를 말하는 칸(징기스칸)과 통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2. [신당서]는 고구려의 서울이 [평양성平壤城 = 長安城장안성],[국내성國內城], [한성漢城] 3 곳이라 했다. 이 곳은 고구려 5 씨(부)족 중 3 씨(부)족의 도읍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평양성平壤城 = 長安城장안성]이 지금의 차이나 산서성 서안시일 가능성도 있다. [장안長安] 이라는 지명은 그리 흔한 지명이 아니다. [한漢서–지리지]에서 현대 코리아 서울특별시에 해당하는 곳이 [경조윤京兆尹] 이고 [경조윤京兆尹]의 수도인 1번 현이 장안長安 현이다.

京兆尹,縣十二:長安,新豐,船司空,藍田,華陰,鄭,湖,下邽,南陵,奉明,霸陵,杜陵。

 

[한漢서–지리지] 가 편찬될 당시는 기원후 100년 경이고, [삼국지]가 편찬될 당시는 기원후 285년 경, [후한서]는 430년 경, [신당서]는 1050년경이다. 역사책 편찬자 입장에서, 특히 당나라도 망한 후인 1050년 경에 만들어진 [신당서] 편찬자 입장에서, 지금의 [서안시=長安]이 기원후 100년경 전후하여 고구려의 서울이었든, 차이나 [한漢 나라]의 서울이었든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동이족의 흔적을 없애는데 주력한 차이나 역사 편찬자들이 [서안시=長安]이 옛날 고구려의 평양성이었음을 실수로 남겨 놓았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3. [신당서]는 고구려의 역사가 668년 기준 900년 전인 기원전 230년 경부터 시작되었다고 쓰고 있다. 高氏 自漢 有國,今九百年,勣年 八十矣 부록1 신당서 고구려전

 

4. [삼국사기 문무왕조]는 고구려의 역사가 668년 기준 800년이라고 한다. 夲攴不絶, 開地千里, 年將八百. 부록2 [삼국사기 문무왕조]

 

5. 차이나 역사책 [사기 주본기]에 [려융驪戎]이 나오는 대목은 기원전 1050년 경 상황이다.

 

“이에 유신씨(有莘氏)의 미녀와 여융(驪戎)의 준마와 유웅(有熊)의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 아홉 대를 다른 기이한 물건들과 함께 주왕의 총애하는 신하 비중(費仲)을 통해 주(紂)왕에게 바쳤다. 乃求有莘氏美女,驪戎之文馬,有熊九駟,他奇怪物,因 殷 嬖臣 費仲 而 獻之紂

 

6. [려융驪戎]의 [려驪] 가 들어간 [고구려高句驪] 는 [후한서]가 제일 많이 쓴다. [삼국지]는 [마馬] 변이 없는 [려麗]를 쓴 [고구려高句麗]로 표기한다.

 

[한서-지리지] [현도군玄菟郡] [고구려高句驪] 현은 [마馬] 변이 있는 [려驪] 이다. 차이나 대륙 서쪽에 있는 현에 [려驪]가 들어간 현이 있다. [장액군 張掖郡] [려간驪靬]현이다. [우북평군 右北平郡] [려성驪成]현이 있다. [동군東郡]에 [리黎]현이 있다.

 

한(=one) 글자 [려麗] 현이 랑야군琅邪郡에 있다.

7. [평양平壤]은 글자 그대로 평탄한 지역이다. 농사나 목축을 하기에 아주 좋은 넓은 땅을 말한다. 지금은 한반도 [평양]이라는 고유명사로 쓰이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보통명사]였을 것이다. [평양平壤] 혹은 [평양성]은 도처에 있으며 어느 시절의 어느 곳인지 확정하기는 쉽지 않다.

 

[평양平壤]의 [평平]이 앞에 들어간 지명은 매우 많다. [한서-지리지]에서 [평양平壤]의 [평平]이 뒤에 들어간 현은 모두 37개이다. [한서-지리지]에서 [평平]이 앞에 들어간 현은 한(=one) 글자인 하남군 평현을 포함하여 모두 43개이다. 앞 뒤로 들어간 현이 무려 80개다.

 

[하동군河東郡]에 [평양平陽현], [천수군天水郡]에 [평양平襄현]이 있다. [천승군千乘郡]에 [평안平安] 현이 있는데 이름이 같은 [평안平安] 현이 [광릉국廣陵國]에도 있다. 한반도에 평안平安남도와 평안平安북도가 있다.

 

광개토대왕비의 묘호(廟號)는 무척 길다. 그 안에 [평안平安] 이 있다.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 (國岡上 廣開土境 平安 好太王)이다. 부족하지만 번역하면 ”북두칠성의 정기를 받은 나라의 제사장이시고 (國岡上 은 고구려 초기의 다른 왕 앞에도 붙인 시호이다), 영토을 넓히고 개척하신廣開土境, [평안平安] 지역 출신이신, 매우매우 위대한好太 왕“이다. (계속)

 

[부록1]

그리고 고(구)려高[句]麗의 비기秘記에 ‘9백년이 못되어 80대장에게 멸망한다(不及九百年, 當有八十大將滅之)’고 하였는데, 고씨高氏가 한漢나라 때부터 나라가 있은지 지금 9백년이 되고, 이적[李]勣의 나이가 또 80입니다. 고구려는 기근飢饉이 거듭되어 사람들은 서로 약탈하여다 팔고, 지진地震으로 땅이 갈라지며, 랑호狼狐가 성중城中에 들어가고 두더지가 성문城門에 굴을 뚫어, 인심人心이 불안에 떨고 있으므로, 이번 걸음에 다시는 출전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남건男建이 군사 5만으로 부여(성)扶餘[城]을 습격하자, (이)적[李]勣은 살하수薩賀水 위에서 그를 쳐부수어 5천급千級의 머리를 베고, 3만명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기계器械와 우마牛馬도 이에 맞먹었다. 진격하여 대행성大行城을 탈취하였다. 유인원劉仁願이 (이)적[李]勣과 합류하기로 약속하고 뒤늦게 도착하였다. 소환召還하여 마땅히 목을 벨 것이나, 용서하여 요주姚州로 귀양보냈다. 설필하력契苾何力은 (이)적[李]勣의 군대와 압록鴨淥에서 합류하여 욕이성辱夷城을 탈취한 다음, 모든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平壤[城]을 포위하였다.

且高麗祕記曰:『不及 九百年,當有 八十大將滅之。』 高氏 自漢 有國,今九百年,勣年 八十矣。虜仍荐飢,人相掠賣,地震裂,狼狐入城,

蚡穴於門,人心危駭,是行不再舉矣。」

 

 男建 以 兵五萬 襲 扶餘,勣 破之 薩賀水 上,斬首 五千級,俘口 三萬,器械 牛馬 稱之。進拔 大行城。劉仁願 與勣 會,後期,召還 當誅,赦流 姚州。契苾何力 會勣軍 于 鴨淥,拔 辱夷城,悉師圍 平壤。

 

[부록2]

삼국사기 > 신라본기 제6 > 문무왕(文武王) > 안승을 고구려의 왕으로 책봉하다

 

〔10년(670) 7월〕 사찬(沙湌) 수미산(須彌山)을 보내어 안승(安勝)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였다. 그 책문(冊文)은 다음과 같다.

“함형(咸亨) 원년(670) 경오 가을 8월 1일 신축에, 신라왕이 고구려의 후계자[嗣子] 안승에게 명을 내린다.

 

공(公)의 태조 중모왕(中牟王)은 덕을 산처럼 쌓고, 공을 남쪽 바다만큼 세워, 위엄 있는 풍모가 청구(靑丘)에 떨쳤으며, 어진 가르침이 현토(玄菟)를 덮었다.

 

자손이 서로 이어져 뿌리와 줄기가 끊어지지 않았고, 땅은 천리(千里), 햇수는 거의 800년이나 되었다.子孫 相継, 夲攴(본지)不絶, 開地千里, 年將八百.

 

건(建)·산(産) 형제에 이르러 화(禍)가 병풍 안에서 일어나고, 골육(骨肉) 간에 틈이 생겨나, 집안과 나라가 깨져 없어지고, 종묘와 사직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살아있는 사람들은 혼란에 휩싸여 마음 둘 곳이 없게 되었다. 공은 산과 들에서 위험과 곤란을 피하다가 이웃 나라에 홀몸을 투탁하였다. 정치 없이 떠돌며 겪은 고생은 그 자취가 진(晉)나라 문공(文公)과 같고, 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킴은 그 사업이 위후(衛侯)와 같다. 대저 백성은 주인이 없을 수 없으며 황천(皇天)은 반드시 돌보라는 명령[眷命]을 내림이 있다. 선왕의 정당한 계승자는 오직 공(公)뿐이며, 제사를 주관하는 것 또한 공이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삼가 사신 일길찬 김수미산 등을 보내서 나아가 책(策)을 펼쳐 공을 고구려왕으로 삼도록 명하니, 공은 마땅히 남은 백성을 어루만져 모아 옛 업적[舊緖]을 계승하고 일으켜서 영원히 이웃나라가 되어 형제와 같이 지내야 할 것이다. 삼가고 삼갈지어다. 아울러 멥쌀[粳米] 2,000석과 갑옷을 갖춘 말 한 필, 무늬 있는 비단 다섯 필, 명주와 곱게 짠 베 각 10필, 솜 15칭(稱)을 보내니 왕은 그것을 받으라.”

遣沙湌須彌山, 封 安勝 爲 髙勾麗王.

其冊曰, “維 咸亨元年 歳次 庚午 秋八月一日 辛丑, 新羅王 致命 髙勾麗 嗣子 安勝. 公 大祖 中牟王, 積徳 比山, 立㓛 南海, 威風 振於青丘, 仁教 被於玄菟. 子孫 相継, 夲攴不絶, 開地千里, 年將八百. 至於 津·産 兄弟, 禍起蕭墻, 釁成骨肉, 家國破亡, 宗社湮滅, 生人波蕩, 無所託心. 公避危難於 山野, 投 單身 於鄰國. 流離 辛苦, 迹同 晉文, 更興 亡囯, 事等衛侯. 夫 百姓 不可 以無主, 皇天 必有以 眷命. 先王正嗣, 唯公而已, 主 於祭祀, 非公而誰. 謹遣使 一吉湌 金須彌山 等, 就披䇿, 命公 爲 髙句麗王, 公 冝撫 集 遺民, 紹興舊緖, 永爲 鄰國, 事同 昆弟. 敬哉 敬哉. 兼送 粳米二千石·甲具馬一匹·綾五匹絹細布 各十匹·綿十五稱, 王其領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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