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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기의 시를 생각하며

김정은 전문 기자
  • 입력 2023.12.13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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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나무, 여행과 삶

       (출처=페스트북)
       (출처=페스트북)

 

이은기 시인의 첫 시집이 나왔다. ‘시를 생각하며’ 부제는 꽃과 나무, 여행과 삶이다. 꽃과 나무에 대한 시들이 특색있다. 개인적으론 꽃보단 나무에 대한 시가 더 와 닿는다.

능소화 시가 좋다. 궁에는 왜 능소화가 많은지. 능소화는 양반집에만 심을 수 있다고 해서 양반화라고도 한다. 꽃말에 명예가 들어가서인가?

 

능소화

 

한 여름 더위에

지칠 듯 지쳐

자꾸만

그늘로 찾아드는

주황빛 옷소매.

 

그 옛날

연모하는 임금님

행여 오실까

궁궐 담 너머로

넘겨 보다가

가까이 하지 못한

한으로

맺혀져 꽃이 되었다더니.

 

오늘도 오지 않는

님 기다리는

궁녀 차림새로

목 빼고 긴 하루를 넘기도 있네.

 

능소화 설화를 제대로 녹여냈다. 소화라는 궁녀가 성은을 입은 후 오지 않는 임금을 기다리다 죽었다는 설화가 시로 잘 승화됐다. 궁녀의 둥근 치마가 연상되는 꽃이다.

 

키 큰 나무

 

나무한테 함부로 하지 마라.

너보다 키 등치 훨씬 크고

그 침묵은 바위처럼 무겁다

 

너보다 오랜 세월

온갖 풍상 다 겪었어도

별 말이 없지 않느냐.

 

나무와 비교하려 들지 마라.

너 보다 온갖 병 풍수해 잘 이기고

기 백년, 수 천년 살기도 한다.

 

로마시대 키케로를 지켜 본

올리브 나무는 2,000살이 넘는단다

네가 얼굴조차 모르는 너의

조상들이 사는 모습도 모두 지켜본

묵묵한 역사가가 그들이다.

 

사람보다 자연이 그 자리에 더 오래 있다. 오래 남아서 생로병사를 겪으며 역사를 겪으며 세상을 겪는다. 일희일비하는 마음을 버려라. 당신이 웃고 우는 몇 날 며칠 나무는 수천 년을 삭였다.

웃어도 울 날이 있고 울어도 웃을 날이 있다.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기만 하라.

 

 

사랑하고

사랑받던 사람들

이내 각각이 별이 되어

 

한 세상 살고 간

이녁 땅 내려보지만

 

바삐 사느라

간혹 올려다보는 이

있을 뿐

거기서도

외롭기는 마찬가지.

 

삶에 대한 시가 가장 좋다. 첫사랑에 대한 시도 좋고 어머니에 대한 시도 좋고 그리움에 대한 시도 좋다. 죽어서도 외로운 게 인간의 숙명이다. 하늘의 별이 되어도 그리움에 내려다보아도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은 없다. 이 겨울 이 추위 마음이 더 얼어가지만 시인의 시가 대신 위로해 준다.

 

이은기 시인은 1954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서울대 법학박사로 사법시험 합격 후 변호사로 활동하다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를 역임했다. 서울고등학교 1학년 때 교내 백일장에서 시 부문을 수상할 정도로 타고난 실력이 있다.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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