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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 지리지 주석을 잘 살펴보자. 낙랑군 패수 동쪽에 있는 왕험성 험독현이 요동군에 속한다. 1) 패수는 최소한 그 지역에서는 북남으로 흐른다 2) 낙랑군은 요동군보다 서쪽에 있다!!! 史記(사기)조선열전 · 漢書地理志 (한서지리지) (3) 부일사학 국사편찬위원회 (68)

이원환 전문 기자
  • 입력 2023.06.12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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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1) 차이나 역사책의 공식적인 시작은 사마천의 사기. 漢字(한자)를 통하여 사기의 주무대를 찾을 수 있다. 비밀코드인 셈이다. 어떤 글자는 발음으로 표시하거나 그 씨족 · 부족 이 거주하던 곳, 장의 이름 혹은 성씨, 근처의 큰 산이나 강 등 표시하기 쉬운 자연물 등을 한 글자로 나타낸다.

 

글자의 왼쪽에 삼수를 붙이면 근처의 ()이 되고, 글자의 오른쪽에 우부방()을 붙이면 마을이 되어 씨족 · 부족의 고향이 된다. (2023324일 필자가 쓴 史記(사기)조선열전·漢書地理志(한서지리지) 낙랑군(1) 부일사학 국사편찬위원회 (47)” )

 

2) ‘사기 조선열전에서 ()만이 처음 살았다는 진번조선의 강역이자, ()나라 옛날 빈 땅 진고공지 상하장’( 秦 故 空地 上下鄣 稍 役屬 眞番朝鮮 蠻夷)을 추적해 보자.

 

현재 차이나 산서성 남부 황하에 북쪽으로 인접한 장치시에는 많은 () 지명이 있다. 탁장하 (흐린 장하) 와 청장하 (맑은 장하)가 합쳐져 장하가 된다.

 

()장하 濁漳河 는 장치시를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동쪽으로 흘러 장하가 되고 위하와 합쳐진다. 장치시 인근에는 () 관련 지명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3) 장하 漳河 가 있음으로 인근 지역에 살던 성씨 부락이 () 씨 부락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 씨 부락이 살던 곳을 특히 () 이라고 했을 것이다.

 

놀랍게도 ()만이 처음 살았다는 진번조선의 강역이자, ()나라 옛날 빈 땅 진고공지 상하장’( 秦故空地 上下鄣)에서 상하를 빼면 이 있다.

 

상장과 하장 두 개로 나뉘어졌다고 볼 수도 있고, 상하가 합쳐진 글자 한 글자 (, )을 잘못 옮겨 쓴 결과로 한 지역이라는 견해도 있다.

( “ 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상하장은 진번국 소속.

https://history-backup.tistory.com/entry/%EC%83%81%ED%95%98%EC%9E%A5%EC%9D%80-%EC%A7%84%EB%B2%88%EA%B5%AD-%EC%86%8C%EC%86%8D )

 

4) () 1, 2, 3장 할 때 이다. 문장, 법률 등 어떤 제도화된 문명의 결과를 말한다. ()씨는 고대로부터 법률 관련 벼슬을 하는 집안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 () + () + () 이다. (태양)을 완전히 잘 (十全) 모시는 () 것을 의미한다.

 

2. 이제 산서성 남부, 황하 이북이면서 하남성 소속인 지역이 ()만 조선의 무대임을 기억하며 한서 지리지의 군현을 살펴보자.

 

3. 요동군

1) ‘한서지리지에서 군은 83개 국은 20개를 합하여 군국이 103개이며, 군국에 속하는 현은 1,314개이다. 1,314/103=13, 1개 군국에 평균 13개의 현이 있다.

 

그런데 83개 군 중 하나인 현도군에는 고구려 현, 서개마 현, 상은대 현 달랑 3개가 있다. 과연 현도군이 () 나라의 군현이었을까? 절대 아니다. 한나라가가 자기들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지방을 자기들의 영토인 듯이 침을 발라놓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2) 요동군은 낙랑군이 설치되기 전인 ()나라때 설치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나라때 요동은 도대체 어디일까? 2023년 현재 차이나 동북3성 중 하나인 요녕성 지역이 기원전 220년 경 진시황의 ()나라때 요동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3) 낙랑, 진번, 임둔, 현도보다 먼저 요동군을 살펴보는 이유는 요동군 험독현 때문이다. 요동군은 현이 18개이다. 인구는 27만여명으로 ()나라 때 설치되어 ()나라가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므로 특별히 차이나가 손댈(조작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4) 그런데, 응소(, 필자는 응소라 한다. 204년에 사망)이 사고를 치고 말았다. “응소(應劭)가 말하기를 조선(朝鮮)의 왕() 만의 도읍인데 강물의 험한 것을 의지하였기에 험독(險瀆)이라 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5) 진나라 때부터 조선이 있었고, 요동군 험독현을 ()만이 조선의 서울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낙랑, 진번, 임둔, 현도 4군을 설치했다는 조선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위치를 정확하게는 몰라도 요동군 가까이에 있어야 할 것이다. 심지어 낙랑군에는 조선현도 있고 패수현도 있다!

 

6) 응소가 주석을 달고, 그 다음 신찬臣瓉( 서진 기원후 265~316)이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 동쪽에 있고 험독()이 맞다고 주석을 달았다. 그 다음 () 사고 (645년 사망)이 신찬의 말에 동의한다고 주석을 달았다. 결국 왕험성은 요동군 험독현이라고 몇 백년에 걸쳐 확인한 것이다.

 

7) 응소는 낙랑군이 전부옛날 조선국이라고 주석을 달았다. 낙랑군에 조선현도 있고 패수현도 있다. 패수현에 당연히 패수가 있었다. 패수의 동쪽에 만조선의 도읍인 왕험성이 있었고 진나라때부터 한나라때까지 변함없이 요동군 험독현이었다.

 

낙랑군 패수 동쪽에 있는 왕험성 험독현이 요동군임으로 1) 패수는 최소한 그 지역에서는 북남으로 흐른다 2) 낙랑군은 요동군보다 서쪽에 있다!!!

 

이제 무엇인가 잘못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낙랑군이 요동군 서쪽에 있다고?

 

최소한 낙랑군 전부 + 요동군 험독현이 조선의 영토였다.

 

8) , 그러면 ()나라때 요동군은 도대체 어디일까? 일단 산서성 중부 한가운데에 () 라고 적힌 지도를 많이 보았을 것이다. 청나라 때 만들어진 지도들이 대부분이다. 여하튼 청나라때까지 산서성 중부는 라는 지명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최소한 청나라 때 요동은 지금의 석가장시 인근이 될 수 밖에 없다.

 

9) 청나라때 가 산서성 중부였다고 해서 ()나라때 요동이 산서성 내 혹은 산서성의 동쪽이라고 결론낼 수는 없다.

그래도 요동의 서쪽에 낙랑군이 있어야 하니,

낙랑군은, 만약 있었다면, 청나라 때의 지방, 지금의 산서성 지역일 수 밖에 없다. (계속)

 

 

부록 1

역사 잡동사니/지리지, “한서지리지의 유주(幽州) 등 우리역사 관련지명 번역” 2018. 1. 4.

https://history-backup.tistory.com/entry/%ED%95%9C%EC%84%9C%EC%A7%80%EB%A6%AC%EC%A7%80%EC%9D%98-%EC%9C%A0%EC%A3%BC%E5%B9%BD%E5%B7%9E-%EB%93%B1-%EC%9A%B0%EB%A6%AC%EC%97%AD%EC%82%AC-%EA%B4%80%EB%A0%A8%EC%A7%80%EB%AA%85-%EB%B2%88%EC%97%AD

 

 

險瀆,[4] 9) 험독현(險瀆縣),[4]

[4] 應劭 曰, 朝鮮王 滿 都 也, 依 水險, 故 曰 險瀆. 응소(應劭)가 말하기를 조선(朝鮮)의 왕() 만의 도읍인데, 강물의 험한 것을 의지하였기에, 험독(險瀆)이라 한 것이라고 했다.

 

臣瓉 曰, 王險城 在 樂浪郡 浿水之東, 此自是 險瀆也. 신찬(臣瓉)이 말하기를 왕험성(王險城)은 낙랑군 패수(浿水)의 동쪽에 있는데 험독현()은 자연적으로() 올바른() 험독이라고 했다.

 

師古曰, 瓚説是也. 浿音普大反. 사고(師古)가 말하기를 신찬의 말이 옳다고 했다. 浿의 음은 배(普大反)이다.

 

 

1) 원문과 주석

遼東郡, 秦置. 屬幽州. 戸五萬五千九百七十二. 口二十七萬二千五百三十九.縣十八.

요동군(遼東郡), ()에서 설치하였고 유주(幽州)에 속한다. 가구수는 5,5972이고 인구수는 27,2539명이다. 현은 18개이다.

 

襄平, 有牧師官. 莽 曰 昌平.

1) 양평현(襄平縣), 목사관(牧師官)이 있다. 왕망은 창평(昌平)이라 했다.

 

新昌, 2) 신창현(新昌縣),

無慮, 西部都尉治.[1]

3) 무려현(無慮縣), 서부도위(西部都尉)가 다스린다.[1]

[1] 應劭 曰 慮 音 閭 師古曰 即 所謂 醫巫閭. 응초(應劭)가 말하기를 의 음은 려()라고 했다. 사고(師古)가 말하기를 즉 이른바 의무려(醫巫閭)라고 했다.

 

望平, 大遼水 出 塞外, 南至 安市, 入海, 行千二百五十里. 莽 曰 長說.[2]

4) 망평현(望平縣), 대요수(大遼水)가 새() 밖을 나와서 남쪽으로 안시현(安市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1,250리를 흐른다. 왕망은 장설(長說)이라고 했다.[2]

[2] 師古曰 説 讀 曰 悦. 사고(師古)가 말하기를 은 열()로 읽는다고 했다.

 

, 5) 방현(房縣),

 

候城, 中部都尉治.

6) 후성현(候城縣), 중부도위(中部都尉)가 다스린다.

 

遼隊, 莽曰順睦.[3]

7) 요수현(遼隊縣), ()은 순목(順睦)이라 했다.[3]

[3] 師古曰隊音遂. 사고(師古)가 말하기를 의 음은 수()라고 했다.

 

遼陽, 大梁水西南至遼陽, 入遼. 莽 曰 遼隂.

8) 요양현(遼陽縣), 대량수(大梁水)가 서남쪽으로 요양현(遼陽縣)에 이르러 요수(遼水)로 들어간다. 왕망은 요음(遼隂)이라 했다.

 

險瀆,[4] 9) 험독현(險瀆縣),[4]

[4] 應劭 曰, 朝鮮王滿 都 也, 依 水險, 故 曰 險瀆. 응초(應劭)가 말하기를 조선(朝鮮)의 왕() 위만이 도읍인데 강물의 험한 것을 의지하였기에 험독(險瀆)이라 한 것이라고 했다.

 

臣瓉 曰, 王險城 在 樂浪郡 浿水之東, 此自是 險瀆也. 신찬(臣瓉)이 말하기를 왕험성(王險城)은 낙랑군 패수(浿水)의 동쪽에 있는데 험독현()은 자연적으로() 올바른() 험독이라고 했다.

 

師古曰, 瓚説是也. 浿音普大反. 사고(師古)가 말하기를 신찬의 말이 옳다고 했다. 浿의 음은 배(普大反)이다.

 

 

居就, 室偽山, 室偽水所出, 北至襄平, 入梁也.

10) 거취현(居就縣), 실위산(室偽山)은 실위수(室偽水)가 나오는 곳인데, (실위수는) 북쪽으로 양평현에 이르러 량수(梁水)로 들어간다.

 

高顯, 11) 고현현(高顯縣),

安市, 12) 안시현(安市縣),

武次, 東部都尉治. 莽曰桓次.

13) 무차현(武次縣), 동부도위(東部都尉)가 다스린다. 왕망은 환차(桓次)라고 했다.

 

平郭, 有鐵官鹽官.

14) 평곽현(平郭縣), 철관(鐵官)염관(鹽官)이 있다.

 

西安平, 莽曰北安平.

15) 서안평현(西安平縣)8 , ()은 북안평(北安平)이라고 했다.

 

, 莽曰文亭.

16) 문현(文縣), ()은 문정(文亭)이라고 했다.

 

番汗, 沛水出塞外, 西南入海.[5]

17) 번한현(番汗縣), 패수(沛水)가 새() 밖에서 나와서 서남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5]

[5] 應劭曰 汗水 出塞外 西南入海 番音盤 응초(應劭)가 말하기를 한수(汗水)가 새() 밖에서 나와서 서남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의 음은 반()이라고 하였다.

師古曰 沛音普盖反 汗音寒. 사고(師古)가 말하기를 의 음은 배(普盖反)이고 의 음은 한()이라고 하였다.

 

沓氏,[6] 18) 답씨현(沓氏縣). [6]

[6] 應劭曰 沓水也 音 長答反 응초(應劭)가 말하기를 답수현(沓水縣)이라고 했다. () 음은 잡(長答反)이다.

師古 曰 凡言 氏者 皆 謂因之 而 立名. 사고(師古)가 말하기를 무릇 라는 말이라는 것은 대개 물()로 인하여 이름을 얻을 때 붙여지는 것이다. 9

 

부록2

Silla > sources > 遼黑史 > -0334 ~ -0108 朝鮮 > -0195 史記(-91) > 0207? 응소(應劭)

http://qindex.info/i.php?x=13851#13851

 

遼東險瀆縣 朝鮮王舊都 요동 험독현은 조선왕의 옛 도읍이다. 험독을 사기에 나오는 왕험의 자리에 넣으면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는다. 한나라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 조선에 낙랑군을 설치하고 도읍이었던 왕험에는 조선현을 설치하였다. 이로써 왕험은 모든 지명에서 사라졌다. 도읍이 지명에서 사라지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응소가 비슷한 이름의 험독을 왕험으로 착각하게 된 것이다.

 

-0108 漢書(82)

稍伇屬真番朝鮮(조선)蠻夷及故燕齊亡在者王之 都王險(왕험) 左將軍破浿水(패수)上軍乃前至城下 樓船將軍亦坐兵至列口(열구)當待左將軍 尼谿相參乃使人殺朝鮮王右渠來降 王險(왕험)城未下 위만 조선은 왕험에 도읍을 두고 세워졌다가 위만의 손자에 이르러 왕험성이 함락되며 망했다. 위만 조선이 험독에 도읍한 흔적은 없다.

13854

 

0008 漢書(82)

遼東郡 縣十八 襄平 新昌 無慮 望平 房 候城 遼隊 遼陽 險瀆(험독) 居就 高顯 安市 武次 平郭 西安平 文 番汗 沓氏 요동군은 낙랑군이 설치되기 전부터 있었다. 한나라가 위만 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군을 설치할 때 험독만을 따로 떼어 요동군에 추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3852

 

0008 漢書(82)

樂浪郡(낙랑군) 縣二十五 朝鮮(조선) 俨邯 浿水(패수) 含資 黏蟬 遂成 增地 帶方 駟望 海冥 列口(열구) 長岑 屯有 昭明 鏤方 提奚 渾彌 吞列 東暆 不而 蠶台 華麗 邪頭昧 前莫 夫租 낙랑은 물론 그 현으로 들어간 조선, 패수 그리고 열구 모두 위만 조선이 패망하는 과정에 등장하는 지명이다. 이것은 낙랑군이 위만 조선이 있던 자리에 설치되었다는 방증이다.

15084

 

0207? 응소(應劭)

朝鮮王滿都也 依水險 故曰險瀆 (요동군 험독현은) 조선왕 만의 옛 도읍이다. 물이 험한 곳에 있다고 해서 험독이라 부른다. 한나라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 조선에 낙랑군을 설치하고 도읍이었던 왕험에는 조선현을 설치하였다. 이로써 왕험은 모든 지명에서 사라졌다. 도읍이 지명에서 사라지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응소가 비슷한 이름의 험독을 왕험으로 착각하게 된 것이다.

13851

 

 

0220 後漢書(445)

遼東郡 襄平 新昌 無慮 望平 候城 安市 平郭有鐵 西安平 汶 番汗 沓氏

6418

 

0220 後漢書(445)

遼東屬國 昌遼 賔徒 徒河 無慮 險瀆(험독) 한서에서 요동군에 속했던 험독이 후한서에서는 요동속국에 들어가 있다.

13847

 

0276 진서(648)

우임금 시절을 상고해 보면 기주 지역은 의 유주가 되었고 의 우북평군과 접하였다. 後漢 말에 공손도가 스스로 평주목을 칭하였고 그의 아들 강, 강의 아들 문의가 멋대로 요동을 점거하고 동이 9종을 모두 복종시켰다. 曹魏가 동이교위를 양평에 두고 요동, 창려, 현토, 대방, 낙랑 5군을 갈라 평주로 만들었으나 나중에 다시 합하여 유주를 만들었다. 문의가 죽자 나중에 호동이교위를 양평에 두었다. 27610월에 평주를 설치하였다.

13848

 

0276 진서(648)

平州 統縣二十六戶一萬八千一百 昌黎郡(昌黎 賓徒) 遼東國(襄平 汶 居就 樂就 安市 西安平 新昌 力城) 樂浪郡(朝鮮 屯有 渾彌 遂城 鏤方 駟望) 玄菟郡(高句麗 望平 高顯) 帶方郡(帶方 列口 南新 長岑 提奚 含資 海冥) 진서에는 창려군을 비롯해서 어디에도 험독현이 나타나지 않는다.

15083

 

0300±

0300±

창려군은 요하 서쪽에 있었다.

13853

 

0316- 신찬(臣瓚)

險瀆(臣瓚曰 王險城 在樂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也 師古曰 瓚說是也) 험독(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 이것이 험독이다. 사고는 신찬이 옳다고 했다.) 험독의 주석에 왕험성 이야기가 붙어 있다. 이는 응소의 착각이 이어진 것이다.

14257

 

0425- 서광(徐廣)

徐廣曰 昌黎有險瀆縣 서광은 창려에 험독현이 있다고 말했다. 창려군에는 험독현이 없다. 옛 험독현이 있었을 수는 있다.

15087

 

0445 후한서

險瀆(史記曰王險衛滿所都) 험독(사기는 왕험이 위만이 도읍한 곳이라고 했다.) 험독에 왕험의 주석이 붙어 있다. 이는 응소와 신찬의 착각이 이어진 것이다.

13850

 

1145 三國史記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平壤者 夲仙人王儉之宅也 或云 王之都王險 왕이 환도성으로 전란을 겪고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평양은 본래 선인 왕검의 땅이다. 다른 기록에는 왕이 되어 왕험에 도읍하였다.”고 하였다.

13843

 

1281 삼국유사

연나라 사람 위만이 망명하여 천여 명의 무리를 모아서 동쪽으로 요새를 빠져 달아나 패수를 건너 진나라 빈 땅의 아래위 장새에 와서 살면서 진번·조선의 오랑캐들과 예전의 연나라·제나라의 망명자들을 차츰 복속시키고 임금이 되어 王儉(는 땅이름이라 하고 臣瓚은 말하기를 왕검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라고 하였다)에 도읍하고 무력으로써 그 이웃 작은 읍락들을 침범하여 항복시키니 진번·임둔이 모두 와서 복속하여, 사방이 수천 리나 되었다.

13844

 

徐榮洙,古朝鮮의 위치와 강역

衛滿朝鮮의 도읍지인 王險(三國史記』『三國遺事에는 王儉으로 表記)의 위치에 대하여史記集解에서는 昌黎有險瀆縣也라는 徐廣의 말을 인용하고,史記索隱에서는 遼東險瀆縣 朝鮮王舊都라는 應劭를 인용하고 있다. 한편漢書』「地理志遼東郡條 險瀆에는 朝鮮王滿都也 依水險 故日險瀆이라는 應劭의 견해와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也라는 臣瓚의 해석이 附記되어 있다. 王險城의 위치는 古朝鮮이나 衛滿朝鮮의 강역은 물론, 위만조선 멸망 ...

13840

 

險瀆

20898

 

험독현(險瀆縣)

현재의 新开河镇이다. 이곳을 사기에 나오는 왕험의 자리에 넣으면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게 된다.

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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