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히로시마 G7 정상회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역사왜곡 ‘전라도 오천년사’
윤석열 대통령은 5월 19일부터 2박 3일 일정으로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 G7 정상회의에 참석한다. 정상회의 참석전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조사단 파견 문제로 정부여당은 최악의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다.
일본의 간악함과 교활함을 제일 잘 아는 나라가 코리아다. 그럼에도 광복후 80년이 다 되어가도 계속 뒷통수를 맞고 있다. 누구의 잘못인가? 잘못된 역사교육이 가장 큰 원인이다.
일본이 교과서에 수십년째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싣는 것은 언젠가는 역사를 조작 왜곡하여 독도를 삼킬 때 써 먹기 위함이다.
정권유지를 위해 일본제국의 모든 것을 그대로 물려받은 이승만 정부는 가로 늦게 ‘대마도’가 코리아 영토라고 주장했다. 지금 ‘대마도’가 조선의 영토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승만, 박정희 정부가 친일 혹은 사실상 부일 (일본에 빌붙는다) 한 이론적 배경을 만든 사람이 일제 강점기 조선사편수회에서 근무한 이병도 등 ‘역사 매국노’ 들이다. 이병도는 ‘역사 매국노’ 수괴로서 역사를 왜곡한 댓가로 문교부 장관까지 지내고 천수를 누렸다. 이병도 등 역사 매국노의 학문권력은 막강하여 단 한 번도 코리아의 국사 교과서를 일제 때와 다르게 고치지를 못하였다.
“ 코리아는 노예근성이 강하다. 고대에는 북으로는 한나라 식민지 (한사군을 말함)였고 남으로는 일본의 식민지(임나일본부를 말함)였다. ” 일본의 이런 주장을 2023년 오늘까지 받아들이고 일본과의 협력을 외치는 정부여당에 ‘알아서 기는’ 부일 코리안 들이 있다.
전라도 역사를 집대성한 '전라도 (오)천년사'. 왜곡 논란이 제기돼 봉정식까지 취소됐던 전라도 천년사가 도민들로부터 직접 검증을 받게 되었다고 언론들이 보도하였다. 세금을 들여 만든 역사책이 [ “전라도 천년사에는 전북 남원시의 옛 지명을 일본서기에 나오는 ‘기문국’(己汶國)으로, 전북 장수군을 ‘반파국’(伴跛國)으로, 전남 해남군을 ‘침미다례’(忱彌多禮)로 썼다”며 “또 ‘임나4현’까지 삽입해 전라도를 통째로 일본의 식민지로 도배해 전라도민을 일본의 후손으로 만들어 놓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는 비판을 받았다. (4월 26일 서울신문 보도)
2. 광개토대왕 비문 조작 전 원문을 밝혀낸 서예가 김병기 와 광개토대왕 비문에 석회칠한 기록을 찾아낸 정인성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필자가 연재하는 부일사학 국사편찬위원회 시리즈는 벌써 63회를 지났다. 원문을 ‘한뿌리사랑세계모임’이라는 페이스북 페이지에 종종 올렸다. 필자가 쓴 기사를 보고 부족한 부분을 지적해 주는 ‘시민 역사연구가’ 허주식 씨가 한편의 동영상과 한편의 기사를 올렸다.
첫 번째 동영상은 놀랍게도 JTBC 가 2018년 1월 3일에 방송한 [ 비문까지 조작한 일본의 역사왜곡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의 둘러싼 진실은?|'잃어버린 우리 문화, 한자' - 김병기 교수|차이나는 클라스|JTBC 180103 방송]
(https://www.youtube.com/watch?v=NhsSP0Qpvkg) 이다.
다소 어려운 내용인데 김병기 교수가 워낙 설명도 잘 했지만, JTBC가 편집을 잘 했다. 질문한 연예인들도 사전에 공부를 하고 온 듯 매우 수준이 높았다.
서예가인 김병기교수는 광개토대왕비의 글씨체를 어느 강연에서 소개하다가 ‘속민과 신민’의 차이를 찾아보게 되었다. ‘속민’은 같은 핏줄이 속할 때 쓰는 용어로 고구려의 입장에서 백제와 신라의 백성은 ‘속민’ 이 된다. ‘왜’는 같은 핏줄이 아님으로 (혹은 같은 핏줄이어도 전쟁을 쳐서 굴복시킨 다음이어서) ‘신민’을 쓴다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비의 변조전 과 변조후를 보자.
1) 변조후의 탁본내용이다. 속민과 신민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 百殘□□□羅 以爲臣民. (탁본)
백잔(百殘)과 신라는 과거에 속민屬民이었기에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신묘년(영락 원년. 391년)에 왜가 와서 바다 (海)를 건너 백잔□□□라를 쳐부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2) 변조전의 탁본내용이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入貢于 百殘□□□羅 以爲臣民. (탁본)
백잔(百殘)과 신라는 과거에 속민屬民이었기에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신묘년(영락 원년. 391년)에 왜가 와서 백잔□□□라에게 조공하였음으로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入(입) 은 渡 로 변조되기 전의 글자이다.
貢(공) 은 海 로 변조되기 전의 글자이다.
于(우) 은 破 로 변조되기 전의 글자이다.
김병기 교수는
“ ① 비문은 가로 세로를 정확하게 줄을 대어 맞춘 흔적이 역력하다. 가로 세로 획이 전부 직선이며 철저하게 수평 수직을 이루고, 글자 크기조차 일정하다. 그러나 ‘渡海破’ 는 수평수직을 유지하지 못하고, 아래로 쓴 비문의 중심축을 벗어나서 왼쪽 오른쪽으로 치우친 바 이것이 부수 (삼氵(수) 나 돌 石(석))을 덧붙인 결과이다.
② 일본이 인쇄를 본격적으로 하면서 18세기에 차이나 명나라 때 목판 글씨를 표준으로 했다. 이를 현재 코리아에서도 쓰는 ‘명조체’라고 불렀다. 명조체는 가로 획이 우상향인 특징이 있다. 바꾼 ‘渡海破’는 명조체의 특징이 명확하다.
비문은 가로 수평이다. ‘渡海破’ 세 글자 모두 “ 다행스럽게” 비문 다른 곳에 나오는데 모두 수평이다.
변조의 완벽한 증거다. 변조되기 전 글자 入貢于 는 변조된 후 ‘渡海破’ 안에 모두 남아 있다.“
라고 설명했다.
광개토대왕 비문에 석회칠한 기록을 보도한 두 번째 기사는 2023년 5월 9일 한겨레신문 보도이다. 아래는 보도를 발췌한 것이다.
[ 그는 (정인성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수년 전 일본에서 입수한 식민사학자 야쓰이 세이이쓰(1880~1959)의 학술 사료 파일(이하 야쓰이 비망록)을 뒤져
1913년 일본 조사단이 총독부 지원을 받은 1차 조선 고적 조사 당시 고구려 수도였던 평양과 만주 집안 유적을 찍은 유리건판 사진 280장과 관련 도면 70여점을 발굴하고 지난달 열린 학술발표회에서 일부를 공개했다. (중략)
현지에 살던 탁본업자 초붕도를 만나 헌병보조원의 통역으로 대화해보니 풍화로 비석 표면이 닳자 1900년대부터 석회를 계속 바르고 기존에 모본으로 생각한 문장의 글자를 임의로 새겨 넣었다는 내용이다.
광개토왕비 비석을 19세기말 이미 일본군 등이 개입해 석회로 덮고 내용을 변조했다는 의혹을 1970년대 역사학자 이진희가 제기한 바 있으나 이 면담 사료는 전혀 알려진 바 없다.]
광개토대왕 비문의 변조 사실을 지금이라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은 매우 다행이다. 변조 전의 글자를 추리해 놓은 서예가 김병기교수의 노력도 대단한 것이다. 2018년 1월에 방송된 내용임에도 어느 누구도 추가적인 연구나 보도를 하지 않은 것은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의 노력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