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1) 일제가 코리아 한국사(민족사)를 훼손한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보다 더 나쁜 사람들이 역사 매국노 들이다.
손자가 서울대총장을 하고 문화재청장을 한 이병도.
그는 일제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가서 광복후 처단되지 않고 문교부 장관까지 지내며 코리아 한국사(민족사)를 한반도에 가두어 버렸다. 북으로는 차이나의 식민지 (한사군), 남으로는 일제의 식민지 (임나일본부)로서 ’살기 위해서‘는 사대(큰 나라에 빌붙음)하는 것을 전통으로 가져왔다고 은근히 반민족주의를 부추겼다.
2) 일제가 한반도를 침략한지, 1876년 강화도 수호조약으로부터 이제 150년 되어간다. 임진왜란이 발생한 것이 1592년이니 284년 후에 다시 한반도를 침공한 것이다. 일본이 잠재적 적국인가 아닌가?
차이나는 1627년 정묘호란 때 직접 침공했으며, 19세기 말까지 일제와 한반도 식민지를 두고 쟁패했다. 차이나가 잠재적 적국인가 아닌가?
3) 본 글은 사마천의 ‘사기’ 등 차이나 역사책만으로 한사군이 얼마나 왜곡된 것인지, 정확하게는 존재했는지 조차 의심스러운 것임을 밝힌다.
2. 사기조선열전
1) 조선과 이계尼谿 (이계는 반절음으로 예濊 혹은 穢 이다)의 승상 각 2명과 예의 장군 1명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한나라에 항복한다. 항복한 5인은 (죽은 1인은 1인의 아들) 모두 제후가 된다.
1-1) 원문은 4군을 만들었는데 이름이 없다. 진번·임둔·낙랑·현도 라고 4군에 처음으로 주석을 단 것도 ‘집해’라는 책이다. 순서도 중요하다.
1-2) 반드시 기억하자!!! 사마천 사기에는 한4군 이름이 안 나온다. 한4군 이름을 처음 써 넣은 것은 ‘사기(주석서)집해’라는 책이다. ‘사기’가 편찬되고 대략 550년 후에 나온 책이다. 과연 ‘사기’를 쓸 때인 기원전 100년에 한4군이 있었을까?
1-3) 以故遂定朝鮮,為*四郡 , 封參為 澅清侯,(이고로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여 4군을 두고 5제후를 봉했다) 에서 為*四郡을 빼면 훨씬 부드럽다. 以故遂定朝鮮, 封參為 澅清侯,(이고로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여 5제후를 봉했다)
2) 사기 조선열전 끝부분 원문과 주석을 그대로 옮긴다. 원문은 차이나 사이트에서 가져왔고, 번역은 국사편찬위 것이다. 필자가 고친 것은 푸른 글씨이다.
2-1) 국사편찬위는 쿠데타를 일으킨 주동자가 4명인 것처럼 해석하고 있으나, 차이나에서 450년 경 발간한 주석서‘사기집해’에서 5명이라고 밝혔다. 필자는 * 다른 이의 주장을 원용하여 尼谿 이계는 濊(예)를 반절법으로 쓴 것으로 본다. 이 + 계 로 뒤의 계에서 ㄱ 이 탈락하는 것이다.
* 안정복의 동사강목 에 나온다고 소개하고 있다. [“사마천이 지은 사기史記에 나타난 우리나라 역사 발췌 번역” , 열국연의 한국사 . 웹사이트는 너무 길어 생략]
2-2 ) ‘尼谿 이계’ 가 ‘濊(예)’ 인 것이 분명하다. 부여가 맥을 잇는 ‘濊(예)’인 것이다.
“ 그(부여의) 도장에 ‘濊王之印’이란 글귀가 있고 나라(부여) 가운데에 濊城이란 이름의 옛 성이 있으니, 아마도 본래 濊貊의 땅이었는데, 부여가 그 가운데에서 王이 되었으므로, 자기들 스스로 ‘망명해 온 사람’ 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 하다.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부여조. 국사편찬위원회)”
2-3) 쿠데타 주동자 승상 로인路人 은 성이 로路 이고, 특이하게 이름이 인人 이다. 같은 성씨끼리 모여살고 혹은 같이 모여 사는 사람들에게 성을 하사해 왔으므로 성씨는 고향과 같다. 어양군(현)에 로路 현이 있고 삼수변 로 潞 지명이 지금도 있다.
3) 5 제후의 고향으로 ‘제후’로 봉해진 곳은 다음과 같다.
3-1) 參為 澅清侯,〔五〕 〔五〕集解 韋昭曰:「屬齊。」 제(군)에 속한다. 索隱 參,澅清侯。韋昭 云 「縣名,屬齊」。顧氏 澅音獲。
3-2) 陰為 荻苴侯,〔六〕 〔六〕集解 韋昭曰:「屬勃海。」 발해(군)에 속한다. 索隱 陰,荻苴侯。晉灼云「屬勃海」。荻音狄,苴音子餘反。
3-3) 唊為 平州侯,〔七〕 〔七〕集解韋昭曰:「屬梁父。」索隱唊,平州侯。
韋昭云「屬梁父」。양보 (현)에 속한다.
3-4) 長〔降〕為幾 侯。〔八〕〔八〕集解韋昭曰:「屬河東。」索隱長,幾侯。
韋昭云「縣名,屬河東」。하동(군)에 속한다
3-5) 最以父死 頗有功,
為溫(涅)陽侯。〔九〕 〔九〕集解韋昭曰:「屬齊。」
온(열) 索隱 最,涅陽侯。韋昭云「屬齊」也。제(군)에 속한다.
3-6) 지도에서 표시해 본 결과, 지금의 한단시가 조선의 수도 왕험에 가장 근접하는 곳으로 생각된다. 사실 여러 모로 한단은 연구해 보아야 할 땅이다. (계속)
4) ‘사기 조선열전’ 마지막 부분 문장별로 대조하여 번역해 보았다.
国学导航-史記 史記卷一百一十五 朝鮮列傳第五十五
http://www.guoxue123.com/shibu/0101/00sj/115.htm
①左將軍 已 并 兩軍,即 急擊 朝鮮。
좌장군이 이미 양군을 합하여 급격히(맹렬히) 조선을 치니,
②朝鮮 相 路人、相 韓陰、尼谿 相 參、將軍 王唊〔一〕 相 與 謀曰:
조선의 승상 로인, (조선의) 승상 한음, 이계(‘예’)의 승상 참, 니계(‘예’)의 장군 왕협,
니계(‘예’)의 승상 여與 5명이 (조선 2명, 예 3명 합계 5명) 모의하여 말하기를
조선의 相 路人과 相 韓陰과 尼谿相 參 ·將軍 王唊이 서로 모의하기를, (국편위 번역 그대로 상 여相 與 가 빠져 있다.)
〔一〕集解 漢書 音義 曰:「凡五人也。戎狄 不知 官紀,故 皆稱 相。唊音頰(겹, 협)。」
索隱 應劭 云:「凡五人。戎狄不知官紀,故皆稱相也。路人,漁陽縣人。」
如淳 云:「相,其國宰相。路人,名也。唊音頰,一音協。」
③「始欲 降 樓船,樓船 今 執,獨 左將軍 并 將,戰益急,恐不能與,(戰) 王又不肯降。」“처음 누선에게 항복하려 했으나 누선은 지금 잡혀 있고 좌장군 단독으로 將卒을 합하여 전투가 더욱 맹렬하여 맞아서 싸우기 두려운데도 왕은 항복하려 하지 않는다.”하고
④陰、唊、路人 皆亡 降漢。路人道死。
[韓]陰·[王]唊 ·路人이 모두 도망하여 漢나라에 항복하였다. 路人은 도중에서 죽었다.
陰、唊、路人 3인 중 앞 2인의 성씨는 나와 있으나 路人 은 글자 2자를 그대로 살려둠으로써 路 가 성인지 아닌지 의문이 생긴다.
④-① 뒤 문장에서 ‘로인’의 아들 최 (혹은 촬 最) 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성씨가 로路 일 수도 있다.
④-② ‘예(니계)’ 가 아닌 조선의 승상임으로 후세에 이름 밝히기를 꺼려 ‘로路’ 땅 ‘사람人’으로 애매하게 표현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름이 ‘인人’이어서 해석에 혼동을 줄 수 있음으로 일부러 성씨 ‘로路’ 를 표시한 것으로 본다. 뒤의 문장에서 우거아들에는 갈 지之 가 없으나 승상 로인의 아들 표현에서 갈 지之 가 들어가 있다.
右渠子 長降、〔二〕 相路人之子 最〔三〕
④-③ 한서지리지 어양군에 로路 현이 있다. 당연히 삼수변 로 潞가 있으며 강 이름이다.
④-④ 로路 부족, 로路 성씨(가문)의 사람으로 이름이 인人인 로인路人 임이 확실하다.
⑤元封三年夏,尼谿相參 乃 使人 殺朝鮮王 右渠 來 降。王險城 未下,故 右渠之大臣成巳又反,復攻吏。
元封 3년(B.C.108) 여름, 尼谿相 參이 사람을 시켜 조선왕 右渠를 죽이고 항복하여 왔으나, 王險城은 함락되지 않았다. 죽은 우거의 大臣 成己가 또 (漢)에 反하여 다시 *軍吏들을 공격하였다.
* 이 때의 軍吏 는 승상4명 장군1명을 말하는 것이다. (필자 주)
⑥左將軍 使 右渠子 長降、〔二〕 相路人之子 最〔三〕 告諭其民,誅成巳,
좌장군은 우거의 아들 長降(䧄)과 相 路人의 아들 最로 하여금 그 백성을 달래고 成己를 죽이도록 하였다.
⑦以故遂定朝鮮,為四郡。〔四〕
封參為 澅清侯,〔五〕
陰為 荻苴侯,〔六〕
唊為 平州侯,〔七〕
長〔降〕為幾 侯。〔八〕
最以父死 頗有功,為溫陽侯。〔九〕
이로써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四郡을 설치하였다. 參을 봉하여 澅淸侯로, 陰은 荻苴侯, 唊은 平州侯, 長은 幾侯 로 삼았으며, 最는 아버지가 죽은데다 자못 공이 있었으므로 溫陽侯로 삼았다.
원문에 달린 주석
〔四〕集解 真番、臨屯、樂浪、玄菟也。
한사군은 진번·임둔·낙랑·현도 이다. 순서도 중요하다.
〔五〕集解 韋昭曰:「屬齊。」 제(군)에 속한다.
〔六〕集解 韋昭曰:「屬勃海。」 발해(군)에 속한다. 索隱 陰,荻苴侯。晉灼云「屬勃海」。荻音狄,苴音子餘反。
〔七〕集解韋昭曰:「屬梁父。」索隱唊,平州侯。韋昭云「屬梁父」。양보 (현)에 속한다.
〔八〕集解韋昭曰:「屬河東。」索隱長,幾侯。韋昭云「縣名,屬河東」。하동(군)에 속한다
〔九〕集解韋昭曰:「屬齊。」索隱最,涅陽侯。韋昭云「屬齊」也。제(군)에 속한다.
索隱 參,澅清侯。韋昭 云 「縣名,屬齊」。顧氏 澅音獲。
부록
以故遂定朝鮮,為*四郡 , 封參為 澅清侯, 陰為 荻苴侯, 唊為 平州侯,封 ①參為 澅清侯, ②陰為 荻苴侯, ③唊為 平州侯, ④長〔降〕為幾 侯。 ⑤最以父死 頗 (매우 파)有功,為*溫陽侯。
* 진번, 임둔 , 낙랑, 현도라고 ‘사기(주석서)집해’에 쓰여 있다. ‘사기’가 편찬되고 대략 550년 후에 나온 책이다.
**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 사기집해(集解), 사기색은(索隱), 사기정의(正義)
집해가 제일 빨리 만들어진 책이다.
[천부경과 삼일신고 2017. 11. 10. 11:38 원본 : 길동선생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jsdkci&logNo=221136788918
배인(裴駰)이 쓴 사기집해(史記集解) 배인(裴駰)은 송(宋, AD 420-479)나라 사람이다
사마정(司馬貞)과 사기색은(史記索隱)사마정(司馬貞)은 당(唐, AD 618 –907)나라 사람이다.
장수절(張守節)과 사기정의(史記正義) 장수절(張守節) 측천무후시대(則天武后, 생몰 624-705) 사람이다.
***온양후 溫陽侯 는 ‘사기조선열전’ 표에는 열양후涅陽侯 로 되어 있으며 주석에는 “先謙曰, 涅陽, 南陽縣, 非齊也 남양현으로 제 齊가 아니다.” 로 되어 있다. 한서지리지 남양군 열양현은 지금의 등邓주시 이북으로 등주시는 낙양에서 남으로 100㎞ 떨어져 있어 전체적으로 설명이 잘 맞지 않는다.
涅阳县,古县名。汉文帝五年(前175年)改涅阳侯国置,”属南阳郡。隋初改名课阳县。《汉书·地理志》载:南阳郡下辖涅阳等县,并为侯国。北魏郦道元所著《水经注》载:“涅水出涅阳县西北岐棘山,东南经涅阳故城西。”唐《括地志》载:“涅阳故城,在穰县东北六十里。”张嘉谋所著《明嘉靖南阳府志校注·古迹》载:“涅阳城在邓州东北六十里,涅水之阳。汉县,属南阳郡,晋因之。”
涅阳(今邓州市北、镇平南一带)
西汉时,南阳归荆州部,辖36县,如宛城(今南阳市卧龙区、宛城区的一部分)、杜衍(今南阳市西一带)、淯阳(今南阳市卧龙区、宛城区的一部分)、西鄂(今石桥镇西一带)、雉阳(南召县一带)、安众(今卧龙区青华镇杨官寺一带)、新野(今新野县)、棘阳(今新野县高庙一带)、朝阳(今新野县王庄乡一带)、穰(今邓州市东南一带)、涅阳(今邓(등)州市北、镇平南一带)、冠军(今邓州市张村乡一带)、乐城(今邓州王良乡一带)、博望(今方城县博望镇一带)、堵阳(今方城县一带)、平氏(今桐柏境内)、复阳(今桐柏吴城一带)、山都(今邓州构林一带)、郦(今内乡赵店一带)、博山(今淅川县丹江口水库区)、析(今西峡县城东一带)、丹水(今淅川荆紫关一带)、湖阳(今唐河湖阳一带)等 [1] 。바이두 南阳郡
https://baike.baidu.com/item/%E5%8D%97%E9%98%B3%E9%83%A1/7962245?fromModule=lemma-qiyi_sense-lem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