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글자도 꼭 같은 두 명의 한신韓信 (의문의 기록 1) 부일사학 국사편찬위원회 (27)

이원환 전문 기자
  • 입력 2023.01.11 23:3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 들어가는 말

 

사기등 차이나 역사에서 왜 유방 ()나라가 강조되는지를 생각해 보자. () 나라 때까지는 임금이 모두 하늘로부터 내려온 사람 즉 天子(천자) 임을 강조하였다. 진시황의 시조가 누구이며, 주나라 의 시조가 누구이며, 은나라의 시조가 누구인데 모두 사기제일 처음에 나오는 누런 황제의 씨족 혹은 친척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한나라 유방은 아무런 신화가 없다. 엄마의 태몽만이 있을 뿐이다. 평민이 최고 권력을 잡았음으로 더 이상 하늘의 자손임을 강조하지 않아도 된 것이다.

 

유방이 태어나고 권력기반을 공고히 한 강소성 서주시 패현은 은나라 마지막 왕의 이복형 미자가 송나라를 세우고 은나라 제사를 지내오던 곳이었다. 차이나 역사에서 처음으로 평민이 황제가 되었는데 그가 나고 자란 곳이 망한 은나라 천자의 제사를 받드는 곳이었다. 유방이 전쟁을 치러 가기 전에 누런 황제와 치우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사기의 기록을 보면, 누런 황제와 치우를 같은 조상으로 모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유방과 항우의 전쟁은 대부분 황하 이남에서 벌어졌다. 진나라 서울이 지금의 서안시 일대이고 먼저 진나라 서울을 정복하는 사람이 임금이 되기로 하였으므로 특별히 황하 이북에서 전쟁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다른 이유는 없을까? 황하 이북이 동이족이 굳건히 세력을 지키고 있던 곳이라면 유방과 항우가 황하 이북에서 전쟁을 치를 수도 없고, 전쟁을 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이미 사기사기안에서만 서로 모순되는 부분을 지적한 바 있다. ‘사기최고의 미스터리 조선의 위치는 어디인가?

 

기자를 조선에 봉했으나 신하가(제후국은) 아니었다.”는 그 조선은 어디인가? 일단 은나라 서울과 상당히 가까운 곳임은 전후 문맥상 충분히 알 수 있다. 은나라 서울을 지금의 하남성 안양시와 학벽시 일대라고 비정하면 조선은 그곳에서 반경 100내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안양시와 학벽시는 황하의 북쪽에 있음으로 하북성에 속해야 하는데 모두 하남성에 속한다는 것이다. 황하는 고대에 어디로 흘렀을까? 하남성, 하북성 가른 것은 현대인데 왜 황하 북쪽 일부를 하남성이라고 했을까?

 

2. 한단은 어디에 있는 도시인가?

1) ‘사기 화식열전은 한단은 장하지간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은 장수인데 현재도 장수 그대로 이름이 전해진다. ‘는 황하를 말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문제는 현재의 한단시가 장수 북쪽에 있고 장하지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2) ‘사기 한신노관열전에서 한나라 임금 유방은 한단이 장수 북쪽에 있음을 시사하는 말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화식열전에서 한 말 (한단은 장하지간에 있다)과 완전히 다른 것이다. 누가 조작했건, 처음부터 사마천이 그렇게 기록했건 우리가 보고 있는 사기는 그 안에서 서로 모순되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上 自 往(상자왕)至 邯鄲(지한단)喜曰(희왈)

고조가 몸소 한단에 이르러 기뻐하며 말했다.

 

豨不 南據漳水(희불남거장수)北守邯鄲(북수한단)知其無能為也(지기무능위야)。」

진희가 남쪽으로 장수(漳水)에 의지하지 않고 북쪽으로 한단을 지키지도 않으니, 그가 큰일을 하지 못함을 알겠다.”

(스윙, 93-4/4[史記列傳(사기열전)] 93 韓信盧綰列傳(한신노관열전) : 陳豨(진희) (4/4) 16.)

 

3. 유방 한나라가 싸운 흉노는 어디에 있는 흉노인가?

1) 스윙의 간결한 해설 소개

93-1/4[史記列傳(사기열전)] 93 韓信盧綰列傳(한신노관열전) : -1 韓王 韓信(한신) (1/4)

 

<韓信(한신) 盧綰 陳豨>

 

한왕(韓王) 한신(韓信)은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과 동명이인(同名異人)이다.

 

 

한신노관열전(韓信盧綰列傳)은 한왕(韓王) 한신(韓信)과 노관(盧綰), 진희(陳豨) 세 사람의 합전(合傳)이다. 세 사람은 각각 흉노와 연합하여 한()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공통점이 있다.

 

한왕(韓王) 한신(韓信)은 사기(史記) 92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에서의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과 동명이인(同名異人)으로 같은 시기에 살았으므로 혼동되고 있어 회음후 한신과 구별하기 위해 한왕(韓王) ()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한왕(韓王) 한신(韓信)은 진나라 말기에서 한나라 초기 사이의 인물로 성은 희(), 씨는 한(), 이름은 신()이다. 전국시대 한()나라 양왕(襄王)의 후손으로, ()나라의 고조 유방에 의해 한왕(韓王)으로 봉해졌으나 흉노와 화친을 하려고 한 것에 오해를 받자, 흉노의 군대를 이끌고 한()나라의 변경을 쳐들어갔다. 한신은 기원전 196년 봄에 다시 흉노의 기병을 이끌고 삼합(參合)을 점령했으나, 시무(柴武)가 이끄는 한나라 군대에 패하고 붙잡혀 참수되었다.

 

2) 코리아 () 韓國(한국)의 왕 韓信(한신) (이하 코리아한신이라고 한다)이 살던 한() (이하 *‘코리아한나라라고 한다)은 낙양시에서 동남쪽으로 비정되고 있다. ’코리아한신은 낙양 동남 오백리 떨어진 영천에서 (지금의 우주시) 지금의 태원으로, 다시 태원읜 북방 마읍 (지금의 삭주시)으로 이동한다. 승리의 공신인데 고향과 전혀 관계 없는 변방으로 보내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다.

 

3) ‘코리아 한신

3-1) 사기 기록 원문을 요약해 보자. 황하 이남에서 멀쩡히 잘 살고 있던 코리아한신을 아무런 연고동 없는 황하 북쪽 태원으로 발령을 낸 것이다. 그 곳은 용맹한 흉노와 상시로 전쟁하는 곳이다.

 

明年春(명년춘)上 以韓信 材武(상이한신재무)

그 이듬해(기원전 201) 봄에 고조(高祖)는 한신(韓信)처럼 재능과 용맹이 있는 사람이

 

所王 北近 鞏(소왕북근공락)南迫 宛(남박완섭)

북쪽으로는 공()과 낙()에 가깝고, 남쪽으로는 완()과 섭()에 가까우며,

 

東有淮陽(동유회양)皆天下勁兵處(개천하경병처)

동쪽으로는 회양(淮陽)이 있어서 모두 천하의 사나운 군대만 있는 곳에서 왕 노릇을 해야 한다고 해

 

乃 詔 徙 韓王 信 王 太原 以北(내조사한왕신왕태원이북)備 御胡(비어호)都晉陽(도진양)

조서를 내려 한왕(韓王) ()을 태원(太原) 북쪽으로 옯겨 오랑캐를 막도록 하고, 진양(晉陽)에 도읍하게 했다.

 

信 上書曰(신상서왈)

그러자 한왕(韓王) 신이 글을 올렸다.

 

國被邊(국피변)匈奴數入(흉노삭입)晉陽去塞遠(진양거새원)請治馬邑(청치마읍)。」

나라가 변경으로 둘러싸여 있어 흉노(匈奴)가 자주 침입하고, 진양은 변방의 요새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니 마읍(馬邑)으로 옮기게 해주십시오.”

 

흉노 방어를 위해 더 북쪽에 있는 요새로 옮겼다는 말을 과연 액면그 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한신은 마한진한변한의 한나라 왕이라고 가정하면 유방 한나라에 밀려 황하 이북으로 밀려갔다고 하면 너~무 앞뒤가 잘 맞지 않나?

 

上許之(상허지)信乃徙治馬邑(신내사치마읍)

고조가 허락하자, 한신은 곧 마읍으로 도읍을 옮겼다

 

고구리사 초략 등에서 나오는 문구와 꼭 같다!!! 이전까지 천자, 이름을 피해서 쓰고 등등에서 으로 통일된 느낌이다.

 

93-1/4[史記列傳(사기열전)] 93 韓信盧綰列傳(한신노관열전) : -1 韓王 韓信(한신) (1/4)https://m.blog.naver.com/swings81/221517584049

 

3-2) 지명 비정 (계속)

 

저작권자 © 미디어피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