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 하夏나라 시조 [우禹], 은殷나라 시조 [설契], 주周나라 시조 [기棄=후직后稷], 진秦나라 시조 백익伯益의 아버지 [고요皋陶]는 동시대 · 동급이다.
순임금 (제 순)이 홍수를 다스릴 때 네 명의 똑똑한 신하가 있었다.
“순이 우를 불러 명했다. “그대는 치수를 다스렸으니 그 일에만 힘써 주시오.”
命禹(명우):「女平水土(여평수토),維是勉之(유시면지)。」
우가 머리를 조아려 절하며, 설(契)과 후직(后稷)과 고요(皋陶)에게 양보했다.
禹拜稽首(우배계수),讓於契(양어설)、后稷(후직)、皋陶(고요)。
순이 말했다. “그대가 가서 이 일을 주관하시오.”
舜曰(순왈):「女其往視爾事矣(여기왕시이사의)。」“ (사기 하본기)
2. 하·은·주의 계보
1) 고요皋陶 의 아들 백익伯益은 ①진시황 진秦나라의 원조이다. ②조赵(趙)나라의 원조이기도 하다.③비 费 성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④ 융서헌戎胥轩 융족에 데릴사위로 혈통을 이어 융족과 혈통이 섞였다!!!
伯益 家族世系
(1)盘古→(중략)→황제黄帝(1-0 오제중 하나)→소호少昊(다른이름 현효 又名玄嚣1-1))→교극蟜极→(중략)→백익伯益(성씨 영嬴, 다른이름 대비 又名大费)→大廉(长子)→(중략)→융서헌戎胥轩(융족데릴사위헌)→中潏→蜚廉(一作飞廉)→恶来→(중략)→秦非子(嬴非,秦国首任君主)→(중략 진나라 왕들)→秦始皇帝(简称:秦始皇,名嬴政,秦朝建立者,中国首位皇帝)→(후략)
(2)(1)과 동일 →융서헌戎胥轩→中潏→蜚廉(一作飞廉)→季胜→(중략)→叔带(赵国始祖)→(중략 조나라 왕들)→조유무왕赵幽缪王(조천赵迁) [2]
(3)(1)과 동일 →伯益(又名大费,配姚氏)→若木(伯益次子)→奄延→琛→铄→费昌(비성의 시조 费姓始祖) [1-2]
(바이두 伯益
https://baike.baidu.com/item/%E4%BC%AF%E7%9B%8A/2110895?fr=aladdin#reference-[1]-116951-wrap )
2) ‘죽서기년’에 의하면 주나라와 융족은 자주 싸웠다. ‘燕京之戎 연경지융.연나라서울에 침입한 융족‘, 余无之戎’(여무지융), 始呼之戎(시호지융), 翳徒之戎 (예도지융) 4번 기록되어 있는데 더 있을 지도 모른다.
3황5제가 융족중에 먼저 차이나에 들어온 집단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황제의 조상(소전 등)에 대한 기록이 없다. 옛날 하나라는 주나라 북쪽인데 여기는 황토고원 지금의 감숙성 지역이다. 주나라는 융족과 싸우는데 은나라는 데릴사위를 한다. 하·은·주 시조들 우·설·기는 동시대 동급으로 순 임금의 신하로서 같이 홍수를 다스렸다.
3. 뭐? 순임금이 우임금한테 규(홀,옥새)를 주었다고?
1) 於是帝錫禹玄圭(어시제석우현규) 以告成功于天下(이고성공우천하)。
이에 순임금은 우에게 검은색의 옥홀을 하사하고, 천하에 치수의 성공을 알렸다. ([史記(사기) 本紀(본기)] 권02. 夏本紀(하본기) 제우(帝禹))
2) 규圭 = 옥홀玉笏 = 옥으로 된 막대기모양 신분증
규(圭)란 고대에 제후가 조회∙회동할 때 손에 가지는 위가 둥글고 아래가 모진 서옥(瑞玉), 즉 천자가 제후를 봉할 때 주는 홀이다.
‘서(瑞)’자는 설문해자에서 옥으로써 증거물, 증명을 삼았다.
<설문해자>에는 봉작의 등급에 따라 그 종류와 길이가 달랐다고 한다.
즉 천자가 공∙후∙백∙자∙남 등 5등의 제후에게 봉작의 증거로 준 홀에는 환규(9치)∙신규∙궁규(7치)∙곡벽∙포벽(5치)이 있었다. 이를 오서(五瑞)라 한다.
이 홀들은 다 옥으로 만들어서, 고문에서는 珪(홀 규)자를 썼다.
하지만 圭로 바꾸었는데, 그 이유는 천자가 제후를 봉하면 그들은 전답과 산천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 숨어 있다.
환규는 곧은 푯말처럼 생긴 것으로 궁실의 모양을 새겨 넣은 홀.
신규와 궁규는 사람의 형상을 새겨 넣은 홀.
곡벽은 옥에다 곡식이나 부들 모양을 새겨 넣은 홀이다. 이렇게 크기와 문양이 다른 것은 존비를 구분하기 위해서였다.[1]
규(圭)자는 ‘土’자를 상하로 겹친 회의자로서 천자가 제후를 봉하면 그들은 토지, 즉 전답과 산천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 숨어 있다. 封(봉할 봉)자도 회의자로서 ‘圭+寸’의 회의자이고 ‘寸(촌)’자에는 ‘법도, 규칙’의 뜻이 있다. 따라서 법도에 따라 제후에게 땅을 떼어 준 것이 곧 ‘封’이다.[2]
(圭. 중국학위키백과 http://chinesewiki.uos.ac.kr/wiki/index.php/%E5%9C%AD )
4. 새로 생기는 의문
1) 설(契) 은 은나라의 시조이다. 후직(后稷)은 주나라의 시조이다. 고요(皋陶)는 백익(伯益)의 아버지다.
* 고요(皐陶)는 소호 금천씨(小昊 金天氏)의 후손이다. 순임금이 우에게 치수를 맡길 때 우가 거절하고 후직과 설, 고요를 추천하였으나 순임금은 우에게 치수를 맡기고 고요(皐陶)는 사(士)를 맡게되어 순임금 때 법관이 되었다. 고요는 부임 후 형법과 교칙을 제정하여 「오형」, 「오교」를 시행하였다. 이때부터 사회가 화합하고 천하가 크게 다스려졌다.
우(禹)임금은 다음 제위를 고요(皐陶)에게 선양하려 하였는데 고요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아들 백익(伯益)의 자손들이 영(英), 육(六), 허(許)에 봉해졌다고 한다.(?)
고요는 공자의 고향으로 알려진 산동성(山東省) 곡부현(曲阜)에서 태어났고 묘지는 안휘성(安徽省) 수현(壽縣)에 있다고 전한다.(?)
당나라 현종(玄宗)이 고요를 덕명황제(德明皇帝)로 추존하였다.
(위키백과 ‘고요’)
2) 皐陶 는 고(호)요(도)로 4가지로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왜 ‘고요’라고 읽으며 언제부터 그렇게 읽었는가? 조선시대? 고려시대?
皐 언덕 고/못 고, 부를 호 陶 질그릇 도, 사람 이름 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