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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충구 칼럼]병든 신도

박충구
  • 입력 2022.10.11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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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로 살아가면서 나는 최소한 두 종류의 관계 범주를 가지고 산다. 크게 나누면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다. 이 중에서 내가 가까이 관계하는 이들은 기독교인, 그들은 신자, 목사, 신학자 세 부류로 나뉜다. 

편의상 신자란 교인을 의미하고, 목사란 목회를 생업으로 삼는 이를, 그리고 신학자는 국내외 정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연구 생활을 통해 먹고 사는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일단 정의한다. 이들은 각기 자기 나름대로 속성이 있다. 

신도들, 오랜 신앙생활을 통해 몸에 기독교 신앙이 밴 이들은 대부분 예수가 언급했던 진리를 알기에 자유인이 된 존재가 아니다. 그 반대로, 사유와 사상과 행동의 범주가 은연중 통제되고 있어서 매우 편협하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틀은 “나는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구원론과 “믿음으로 축복받는다.”라는 막연하지만, 실질적인 구복적 신앙이다. 

 

[박충구 칼럼]병든 신도. 사진은 기사의 내용과 관련이 없음(사진=Pixabay)
[박충구 칼럼]병든 신도. 사진은 기사의 내용과 관련이 없음(사진=Pixabay)

 

이들은 좋은 일이 생기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라고 감사히 여긴다. 나쁜 일에 대해서는 마치 하나님이 징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더 충성을 다짐하며 하나님께 해결해 달라고 기도한다. 

교회에서 배운 이 두 가지 범주는 사실 “교회 다니는 것을 구원받은 것'으로, 그리고 '교회에 다님으로써 축복받는다'는 의미로 변환된다.  그리스도인이기 보다는 교인이다. 

이 기본적인 원칙에 합의한 무리가 교회에 모인다. 이들은 구원과 축복을 받기 위하여 헌신과 봉사와 헌금 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보이게 보이지 않게 헌신과 봉사와 헌금 생활에서 경쟁한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덤으로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성도의 교제가 일어난다. 

가끔 의도적이며 악의를 가진 교활한 신자도 있지만 대부분 교회에서 만나는 이웃들은 선한 이웃이다. 이들의 만남에서 아름다운 교제가 일어나는 경우도 많다. 힘들고 어려울 때 의지할 수 있는 신앙 동지가 있다는 사실, 고독한 삶의 곤경에서 기도할 수 있는 영성적 관계, 그리고 이런 신앙생활에서 만난 선한 이웃들과의 오랜 교제는 분명 삶을 풍성하게 해주고, 깊은 신앙적 위안을 얻게 한다. 

하지만, 실상에 있어서 이들은 교회 집단의 얼개 속에서 동종 번식만 하므로 직간접적인 사상적 통제를 받는다. 말 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이 알게 모르게 나누어지고, 말해서는 안 될 것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문화적 통제를 받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선을 넘어가면 그런 사실은 위로 전달이 되어 특정한 감시와 주의의 대상이 된다. 

여기서 정치적 논의는 비공식적으로 금기 사항이 되어 있다. 그렇다고 이런 입장이 꼭 정치적 중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실 금기 사항이 되었다는 말은 ‘기존의 질서를 따르는 것”만 허용한다는 하나의 정치적 입장이다. 정치에 대한 열린 논의는 금기가 되지만, 기존의 정치적 흐름을 지키고 지지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마치 비정치적인 양 가르쳐진다는 것이다. 

현실 정권이나 권력자에 대한 비판, 정치적 이견, 종교적 이견, 교회에 대한 보다 나은 상상력 등을 가진 이들은 교회 분위기를 망치는 자로 규정되기 쉽고, 그런 도발적 행위를 계속 하다가는 생존하기 어렵다. 교회에서 생존하려면 입 다물고 참고 견뎌야 한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배우기 때문이다. 

그결과 이견자는 소리 없이 떠나고, 오로지 동의하는 이들만 남아 있는 곳이 교회다. 남아있는 이들은 내(內)(in-group) 집단이 되어 집단 이기성에 쉽게 사로잡힌다. 겉으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분명 민주사회인데, 기독교인은 대동소이하게 기이한 전체주의적인 집단 이기적 정신 지형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내집단에 익숙하기 때문에 자신이 간혹 “기이하고, 뻔뻔스러울 정도로 이상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심지어 부흥회나 금요 집회에서 맹신을 칭송하고 예찬하는 무리가 된다. 평생을 이렇게 살다가 늙은 사람들이 소위 교회의 어른이다. 그중에는 모범 신자로 인정받아 권사가 된 이도 있고, 장로도 있다. 

정치인들은 교회에서 종교와 정치의 교묘한 야합을 좋아하는 목사들에게 픽업되어 자신의 도덕성을 세탁하고, 정치적 이익도 취할 수 있다. 비판적 사고를 금기시하는 편리한 기독교를 이용하여 부정한 자신을 감출 수 있고, 탐욕과 권력을 확장할 기회를 쉽게 포착할 수 있다. 왜냐하면 대부분 신자는 자기 정치적 견해를 가지기보다, 그저 맹신자로서 같은 교회 교인이라는 이유로 그가 어떤 정치 철학을 가지고 있는지를 묻지도 않고, 상관도 하지 않고, 몰표를 던지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보수적인 교회일수록 목사가 교사하는 대로 마치 신앙적 순종행위를 하듯이 몰표를 던지기도 한다. 

이렇게 비정치적이면서 정치적으로 길든 신자들은 세 가지 공포를 느끼고 있다. 목사가 지목하면 평소 선한 표정을 가지고 살던 이들이 공포에 절어 무서운 공격자의 얼굴로 변한다. 첫째,  영혼을 파멸시킨다는 이단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단이 뭔지 판단할 능력이 없다. 목사가 이단이라고 하면 이들은 그 지목된 이단을 무섭게 증오하고 외면한다. 

둘째, 무신론자를 두려워한다. 아무리 선한 의도와 행위를 한다고 하여도, 일단 공산주의나 빨갱이들은 하나님 신앙의 적대자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산주의나 빨갱이가 언제 적인 존재인지, 그 본질이 무엇인지 잘 설명하지 못한다. 거의 북한 공산당과 동의어로 이해한다. 셋째, 이견에 대한 공포증이다. 자기와 다른 믿음이나, 생각을 가진 이들을 향해 이들은 “다르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틀렸다.”라고 판단한다. 

이 세 범주에 대해서는 합리적 사고를 포기하고, 신앙적 전투 태세를 갖추도록 길러진 이들이 기독교인이다. 이 세 가지 범주는 신자 스스로 깨달아 아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목사의 교시와 같은 설교나 교회 분위기에서 인지되고 익히게 된다. 

영락교회가 한경직의 반공사상과 기독교 신앙의 혼합주의를 주장한 것도, 감리교 정동교회의 이승만이 종교와 정치를 섞어 정치를 위한 종교로 이용한 것도 하나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권력 근친성을 즐기며 이들은 자신들이 기독교 주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정신적 구조에서 기독교인들은 스스로 자신을 착하고 선하다고 착각한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스스로 비판할 사유의 능력이 없고, 교회 안에서는 이를 절대 비판하지 않기 때문이다. 간혹 밖에서 비판이 일어나면, 그것을 불신앙 자들의 넑두리 정도로 여기고 무시한다. 

교회 안에서는 위의 세 가지 적대자들을 향한 증오, 공격성, 비난, 혐오가 좋은 신앙의 증표, 곧 선으로 포장되어 있다. 이런 기독교 문화 구조는 간혹 반사회적이며, 반민주적인 특질을 드러낸다. 기독교의 병폐 무서운 주류 집단의 폭력성, 십자군 징후다. 그리고 이런 십자군적 폭력은 간혹 현실 정치에서 극우들에게 이용된다. 

타종교를 향한 개방성, 공산권에 대한 평화적 접근, 그리고 동성애자 인권 옹호 등의 주제가 제기되면 이들은 보수나 진보를 막론하고 궐기한다.  극심한 거부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평화를 감상적으로만 이해한다.  평화를 위한 실천 지평을 아예 거부하도록 다 막아놓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우파들은 거대해진 기독교 집단을 이용한다.  정치가들이 대부분 극보수 교회에 붙어 기생하는 이유는 보수적인 목사나 신자일수록 극단적인 용병을 자처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전광훈이 같은 이가 하나의 예인데, 그가 유명 정치가들을 불러 세워 놓고 대중 앞에서 어린애 취급하는 것은 자신이 그들을 하수로 부리는 권위자라는 암시를 대중에게 보내기 위한 것이고, 그 반대급부로 정치가들은 선거철마다 그의 신자 무리를 극우 세력을 위한 정치적 용병 떼거리로 쉽게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기독교가 왜 개독교가 되는지, 기독교 신자들이 왜 간혹 개독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불리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나는 요즘 이런 신자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일 수 있을까 자꾸 묻게 된다. 교회라는 정신적 게토에 갇혀 기이하게 변종 진화한 교인이 과연 진정한 예수의 제자일 수 있을까…, 묻게 되는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교인은 기독교인이 아니다. 기독교인은 예수를 닮아야 기독교인이다.  차라리 스스로 생각하고 골고루 우리 사회가 기리는 덕목을 갖춘 민주시민이 예수와 더 가깝다는 생각도 든다. 칼 라너의 표현을 빌리면 익명의 신자라 할까. 편협한 신자로 사는 일에 불편이 없는 교인들은 동의하기 어렵겠지만, 그들 대부분은 지독한 집단 자아 도취라는 정신병에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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