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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기억 5-7 / 빨간 십자가

김홍성
  • 입력 2021.02.08 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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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암동에 다녀온 지 며칠 안 되어 적음 형이 회사로 찾아 왔다. 모자도 없이 맨 머리로 삐뚜름하게 서서 빙그레 웃는 눈에 눈물이 슬쩍 맺히는가 싶더니 수선스러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복도가 울릴 정도로 큰 웃음 소리였다. 편집실에 있는 동료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서 앞장세우고 등을 밀다시피 회사 밖으로 나왔다.

회사에서 좀 떨어진 중국 음식점 이층 구석방에서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물었다. 적음 형이 두서없이 말한 바를 정리해 보면, 술이 너무 취해서 서울역 벤치에 누워 있었는데 그 놈들(경찰 또는 방범)이 와서 일어나라고 하여 간신히 일어났는데 그 다음은 잘 모르겠고 마구 얻어맞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갱생원이더라고 했다. 그게 석 달 전 일이라고 했다.

주문한 음식이 왔다. 자장면, 짬뽕, 야끼만두. 내가 시킨 건 그게 다인데 소주와 소주잔 두 개도 따라왔다. 소주는 안 시켰다고 했더니 ‘저 분이 주문했어요.’ 라는 대답이 돌아 왔다. 잠깐 화장실에 간다더니 그 사이에 시킨 거였다. 한숨이 나왔다. 술 때문에 석 달 동안 갇혀 있었는데 나오자마자 또 소주라니!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미 가져다 놓은 소주를 물리는 건 적음 형에게 너무 잔인한 짓이었다. 수캐는 앉으면 좆 나오고 술꾼은 앉으면 소주가 나온다고 했던가?

건배를 하고 나서 소주잔을 내린 적음 형의 손이 좀 이상했다. 오른손 엄지와 검지가 만나는 자리의 피부에 시커먼 피딱지가 동전 만하게 붙어 있었다. 왼손도 그랬다. 무슨 일을 했는데 두 손이 다 그 모양이 됐나 싶었다. 고문이라도 당했나 싶기도 했다. 왜 그렇게 됐냐고 물었더니 웃다가 눈물이 날 뻔한 얘기를 해 줬다. 적음 형의 이야기를 대충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매일 저녁에는 막걸리를 한 사발 씩 줬어. 대부분 주정뱅이들이라서 그거라도 안 주면 목숨을 걸고 탈출할 테니까 주는 거야. 우리는 얌전하게 줄을 섰어. 줄이 길지만 한 발 한 발 앞으로 가다보면 납작한 배식구가 나와. 그 안에 막걸리 퍼 주는 수녀가 있어. 수녀나 나나 서로 얼굴은 안 보여. 배식구 안에 손을 넣으면 여기다가(피딱지를 보여 주며) 빨간 매직펜으로 십자가를 그어. 그건 술을 줬다는 표시야. 먼저 그렇게 표시 하고 작은 사발로 한 사발 내주는 거야. 한 홉 쯤 될라나 그래.

적음 형은 소주를 한 모금 쪽 빨아서 목구멍으로 넘긴 뒤에 뒷말을 이었다.

내가 그걸로 되겠어? 다시 맨 뒤로 가서 줄을 서지. 한 발 한 발 앞으로 가서는 배식구에 왼손을 디밀었어. 왼손에도 십자가 표시가 생겨. 막걸리 한 홉을 더 마시는 거지. 그러다가 아무래도 술이 모자라서 십자가를 지우기 시작했지. 빨간 십자가를 혀로 핥다가 턱에다 비비면 금방 지워졌어. 깨끗한 손이 들어오니까 또 한 사발 내밀어 주지. 매일 그러다 보니 이렇게 피딱지가 생겼어.

적음 형은 딱지 앉은 손등을 수염이 까칠까칠한 턱에 문지르는 흉내를 내며 켈켈켈 웃으면서 소주잔을 들어서 찔끔 마셨다. 소주는 오랜만이라서 천천히 조금씩 마셔야 된다고 했던가?

다른 얘기도 해 주었는데 그건 기억이 안 난다. 무려 38년 전 일 아닌가? 그러나 적음 형의 양손에 붙어 있던 피딱지는 아직도 눈에 선하다. 밤에 술 마시고 귀가할 때마다 보이곤 하는 교회당의 빨간 십자가가 적음 형 두 손의 피딱지를 상기 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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