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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이시백 장편소설, '용은 없다'

권용
  • 입력 2021.01.15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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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백 소설의 풍자와 해학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새롭게 펴내는 장편소설 『용은 없다』는 이전의 소설과 많이 다르다. 그것은 우화와 설화를 통해 민중의 근대사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풍자와 해학은 여전한 작가의 장점이지만, 마치 보르헤스의 기법을 차용한 듯 가상과 실제의 문헌을 동원해 다른 차원의 해학을 구사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민중의 삶을 디테일하게 그리면서 국가권력을 우스개의 대상으로 풍자한다. 오늘날 비판에 웃음이 사라지면서 비판 자체가 삭막해지는 세태를 작가는 소설적으로 넘어서고 싶었건 걸까?

몽룡과 아지의 만남부터가 예사롭지 않지만, 아지와 구렁이 사이에서 탄생한 쌍둥이 형제 금룡과 은룡의 존재도 근대의 수레바퀴에 깔린 민중의 캐릭터로서 손색이 없다. 이시백의 민중은 국가의 폭압에 정치적으로 저항하는 존재는 아니다. 도리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꾸준히 살아감으로써 국가를 무력화하는 존재에 가깝다. 특히 아무리 맞아도 고통을 느끼지 않는 금룡의 존재가 그렇다. 고통을 느끼지 않는 캐릭터로 금룡이 설정되어 있지만 국가가 가하는 폭압이 민중에게 고통을 야기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 고통은 금룡의 어머니인 아지나, 차남의 상징인 은룡, 그리고 애꾸왕 때문에 죽은 여동생 말희를 통해 드러난다. 작가는 한 존재에게 한 가지 역할을 입체적으로 부여하는 방법을 피하고 전체 인물에게 각자의 역할을 맡기면서 그 고통이 개별자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는 듯하다.

특히 금룡은 이 소설의 주인공 격인데, 아둔한 것 같지만 강하고, 무지한 것 같은데 영리하게 국가를 우스개로 만들어버린다. 그 강력한 무기는 바로 어떤 고통을 가해도 무너지지 않는 신체적 특성이다. 금룡만 그런 것은 아니다. 놀음에 빠져 사는 아버지 몽룡 또한 민중의 한 속성을 부여받는데, 특히 고산족의 집들을 철거하는 과정에 대한 묘사는 해학을 통해 저항하는 민중적 지혜를 떠올리게 한다.

그 일은 가림판 공사를 마치고 집에서 놀던 천변족에게 맡겨졌다. 일당이라도 타 먹을 요량으로 나섰지만, 고산족들의 집을 허무는 게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과부 사정은 홀아비가 아는 법이었다. 철거에 나선 천변족들은 감독관의 눈을 피해 판자의 못들을 얌전히 뽑아서 언제든 집을 다시 지을 수 있도록 철거했다. 그건 철거가 아니라 정교한 해체였다.

천변족과 고산족은 1970년대 도시 빈민을 떠올리게 한다. 그들은 평지에 살고 싶지만 부자들이 사는 평지에 진입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천변족과 고산족은 각각의 이해에 따라 대립하고 갈등하지만, 위에서 든 인용대로 ‘북쪽 나라’의 사절단에게 얕보이지 않으려고 고산족 집을 철거하는 ‘애꾸왕’에게 저항한다. 소설을 읽다가 보면 자동적으로 떠올리게 되겠지만 여기서 ‘애꾸왕’은 박정희를 희화화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이 역사소설인 것은 아니다.

아무튼 아버지 몽룡이 허망한 꿈에 휩싸여 죽고 가장이 된 금룡은 평지로 진출했지만 그 평지는 부자들의 동네가 아니라 ‘텍사스촌’이었다. 금룡의 역사는 이 ‘텍사스촌’에서 시작되며, 작가 이시백이 ‘텍사스촌’을 통해 보여주려는 의도 역시 분명해 보인다. 그것은 애꾸왕으로 상징되는 국가만이 아니라 ‘텍사스촌’으로 상징되는 주둔군의 존재, 즉 외세의 그림자를 말하기 위함이다.

 

이야기를 통해 풀어낸 근대사

하지만 금룡은 특유의 저돌성으로 삶을 꾸려나가는데, 그게 숭고하거나 아름답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신체적 고통을 아랑곳하지 않는 마구잡이식에 더 가깝다. 그런데 이 마구잡이식의 삶이 묘한 전형성을 창출한다. 왜냐하면 금룡의 가족이 처한 상황이 마구잡이식을 당연시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체적 고통을 못 느끼는 특이함으로 마구잡이로 살아가는 금룡에게서 웃음이 자꾸 터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 신체적 특성은 국가의 심기를 자꾸 거슬리게 하는데, 작가는 여기에 무슨 큰 정치적 상황을 끌어들이지는 않는다. 애꾸왕 체제 자체가 민중의 건강성과 대립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금룡이 약장수를 따라다니면서 기획한 차력 쇼 ‘내 배에 총을 쏴라’는 우리를 웃게 하면서 동시에 국가와 민중의 대립을 드러낸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어린이날에 예정되었던 금세기 최고의 차력 쇼는 열리지 못했다. 배에 총을 맞아야 할 주인공은 그 시간에 정보기관의 축축한 지하실에서 거꾸로 매달린 채 통닭구이가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틀 동안 온갖 고문과 협박으로 그들이 알고 싶었던 것은, 백성을 사랑하는 왕의 지극한 마음과 영험한 통치로 유사 이래 최고의 태평성세를 누리고 있는 시점에, 배고파 못 살겠다고 제 배에 총을 쏘라는 쇼를 벌인 저의가 무엇인지, 북쪽 나라의 지령을 받아 해괴한 망언으로 민심을 흐려 국력을 저하시키려는 흉측한 이적 행위를 하려던 것은 아닌지를 여든아홉 번이나 물었다.

남북의 대립을 통해 체제를 유지하던 애꾸왕에게 금룡의 차력 쇼는 민중을 술렁이게 할 개연성이 컸던 것이다. 그래서 정보기관을 동원해 금룡을 고문한다. 정보기관이 금룡을 붙들어가 고문을 가하는 장면은 그 뒤로도 몇 번 더 나온다. 하지만 금룡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 특성으로 정보기관을 자기도 모르게 골탕 먹이고, 나중에는 금룡에 대한 연구까지 진행되지만 결과는 갈수록 오리무중이 되고 만다.

소설의 끝 부분에 가서야 작가는 금룡과 은룡의 존재를 겹쳐놓는다. 금룡의 쌍둥이 동생이자 출생신고도 하지 않은 그림자 같은 은룡은 소설 속 인물로서는 다르게 나타나지만 작가의 심중에서는 금룡과 은룡이 한 존재였던 것이다. 즉 작가는 민중의 집단적 속성을 각자의 인물에게 배분해 캐릭터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각각의 인물들은 비루하고, 비겁하고, 거짓말을 잘하고, 이(利)에 민감하지만 동시에 강건하고, 노래를 잘 부르고, 꿈을 꾸고, 슬픔에 지지 않기도 한다. 국가에 직접적 저항보다는 자신들이 꾸려가는 삶의 결에 따라 휩쓸리면서 동시에 저항한다.
하지만 작가는 ‘민중 승리’를 외치지 않는다. 도리어 약간 비극적으로 소설을 끝맺는다.

사람들은 용이 되기를 꿈꿨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하늘에서 떨어진 미꾸라지라는 걸 알지 못했다. 그들에겐 이미 기어 올라갈 하늘이 없었다. 하늘을 바라보기보다 땅에 떨어진 동전이나 빈 종이 박스를 줍기 바빴다. 하늘이 사라지자 용도 사라졌다. 있다 해도 올라갈 하늘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작가 이시백의 리얼리즘이기도 하고, 현실 인식이기도 하다. “올라갈 하늘”이 없는 한 누구도 용이 되지 못한다. 개천의 암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올라갈 하늘”이 없다는 작가의 현실 인식은, 둔중하게 독자의 가슴을 때릴 것이다. 재미난 이야기 한 토막을 듣고 슬퍼지는 것은 오늘날 참 희귀한 덕목이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어릴 적 조부에게 들었던 이야기의 재미를 따라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과연 『용은 없다』는 유장한 이야기를 통해 한국의 근대사에 육박하고 있으며, 민중적 관점에서 우리에게 근대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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