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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용원 음악통신 369] 그노시엔느가 흐르는 기괴함: 영드 '창백한 말'

성용원 작곡가
  • 입력 2021.01.04 10:52
  • 수정 2021.01.04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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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사 크리스티 원작인 '창백한 말'의 2020년 영국 BBC의 실사화 드라마까지

Pale Horse.....직역하면 창백한 말이다. 사람이든 말이든 안색이 안 좋고 핏기가 가셔 곧 죽을 거 같은 푸르뎅뎅한 모습은 섬뜩하다. 우리나라로 치면 저승사자 정도 되는 Pale Horse는 영어권에서 죽음의 사자(使者)를 의미한다. 성경의 요한계시록 6장에서 언급되는 '재앙을 불러일으켜 세계를 멸망시킬 4명의 기사' 중 초자연적인 죽음 그 자체를 상징하는 죽음의 청기사가 타고 다니는 말이 창백한 말인데서 유래한다. 1961년 아가사 크리스티가 발표한 추리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창백한 말'이 2015년부터 BBC에서 진행하고 있는 크리스티 작품의 실사화 프로젝트 일원으로 2020년 2월 BBC1에서 창백한 말의 2부작 각색 방송이 방영되었다.

아가사 크리스티 원작의 '창백한 말', 영국 BBC의 2020년 실사판 드라마, 사진 갈무리: 영드 창백한 말

부유한 골동품 중개상 루퍼스 마크 이스터부룩(루퍼스 스웰)의 이름이 죽은 자의 구두 밑에 숨겨둔 메모에서 발견된다. 명단에 적힌 사람들은 죽은 자 또는 앞으로 죽을자들로서 처음엔 음모를 부정하는 주인공이 역추적하면서 한적한 시골마을 머치 데핑에 위치한 '창백한 말'의 놀라운 비밀을 알게 되어 자신도 저주를 받았다는 강박에 빠져든다. 강령술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소문이 난 ‘창백한 말’이라는 여관의 세 노파들을 파헤치면서 이스터부룩의 아내인 허미야(카야 스코펠라리오)까지 연계되는 스릴러다. 컬트적인 내용, 고통 없인 죄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알려주는 파멸의 메시지가 영국 특유의 칙칙한 영상미와 '마녀'같은 세 노파까지 드라마를 보는내내 빨려들게 만든다.

영드 '창백한 말'의 세 마녀 

영화 초반, 고양이를 치고 왔다고 거짓말을 하는 남편을 의심해 지하 쓰레기장까지 내려가 거짓말인줄 간파하고 베개를 식칼로 후려치면서 광적인 분노를 표출하는 장면에 사티(Erik Satie)의 <그노시엔느>(Gnossiennes) 중 1번이 흐른다. 고대 그리스의 미소년들이 나체로 춤을 추는 배경 같은 나른하고 멜랑꼴리한 분위기 ‘짐노페디’로 유명한 에릭 사티가 '고대 그리스인'이라는 뜻으로 스스로 만든 제목을 붙인 그로시엔느는 영지주의(Gnosis), 크레다섬 문명의 중심지 크노소느(Knossos)와의 연관성 등 갖은 해석이 난무하는 작품이다. 

남편의 외도에 분노하는 아내의 섬뜩한 눈초리에 흐르는 사티의 그노시엔느

몽환적이면서 안개빛 같은 점점 영화의 제목과 같은 창백한 색깔의 총 6개로 되어있는 <6개의 그노시엔느>의 각 곡 머리에는 ‘Avec etonnement’(놀라움을 가지고), Modere’(절제해서), ‘Avec conviction et avec une tristesse rigoureuse’(확신과 절대적 슬픔을 가지고) 등의 악상 지시가 붙어있으며 곡 중간중간 ‘매우 기름지게’ ‘혀끝으로’ ‘구멍을 파듯이’ 같은 기절초풍할 변태(?)적인 단어들이 툭툭 튀어 나온다. 프레이즈의 구분과 강약의 대조와 같은 전통적인 음악방식을 완전히 뒤엎어 놓았다. 이런 모습에서 음조, 화음 구조, 강약 조절 등을 무척 중요하게 여기는 미니멀리즘(Minimalism)의 시초라고도 할 수 있고 뉴에이지(New Age)음악의 선조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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