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야기꾼 박철하와 함께 하는 의왕의 마을 이야기, 길 이야기

김은지 전문 기자
  • 입력 2020.06.29 09:40
  • 수정 2020.06.29 22:5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 6정승 마을길을 걷다

6월 4째 주 토요일 이야기꾼 박철하와 함께 의왕 마을길을 걸었습니다.

고천체육공원 매점에서 만난 2차 의왕답사는 청풍김씨 묘문비로 시작해 왕곡천변길을 걷다가 서현의 경치를 즐긴 후 별묘길을 지나 김유묘역으로 향했습니다.  

지금부터 의왕의 이야기꾼 박철하님과 함께 걸어보겠습니다.

왕림마을에 들어서면 왼편에 작은 공원이 있습니다.

그곳에 앉아 왕림마을 지명유래와 옛 모습을 그려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곳은 행정구역상 고천으로 사근행궁이 위치한 곳입니다.

묘문비 들어보셨나요?

청풍김씨묘문비라고 적혀 있습니다.

하마비도 근처에 있어서 이 곳을 찾는 이들은 말에서 내려 걸어오라고 했다고 하니 그 위세가 대단했을 거 같아요. 현 묘문비가 위치한 동남쪽은 현재 왕곡초등학교와 아파트 단지가 있는데, 개발되기 전까지 논이었고 그 논 가운데 이 묘문비가 세워져 있었다고 합니다. 과천 봉담간 고속도로가 생기고 주변이 개발되면서 동네 안으로 들어왔다가 마을입구에 세우는 것이 맞다 하여 지금 현 위치에 자리 잡게 되었는데, 장승과 함께 마을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물소리, 풀 향기 가득한 6월의 왕곡천을 함께 걸으면서 수원화성의 기와제작소가 고천, 왕곡지역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원화성박물관 2층 상설전시실에서 벽돌을 굽는 디오라마가 있는데 의왕에서 대부분의 벽돌을 제작한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종대학교에서 지표조사를 통해 발굴한 기와 중에는 황제만왕이라고 적힌 기와가 있었다고 합니다. 

자연하천이었던 때 이 곳에는 모래톱이 많았다고 하는데요. 연사록과 연행록을 남긴 품산 김직연의 서현8경에서 보이는 아탄 어부의 피리소리의 아탄이 이 왕곡천입니다.

다시 마을길로 들어갑니다. 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마을이지만 이렇게 삶의 터전을 지켜나가는 분들의 정성을 만나게 됩니다. 골목길 탐방이 많아지면서 거주민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들이 있어 조심해주길 당부하셨어요. 동네 분들이 이야기꾼의 동네 친구, 동생, 친구 부모님들이어서 훨씬 정감이 갔습니다. 

오래된 나무 두 그루가 서 있습니다.지정일 기준 수령 540년이 된 은행나무와 120년이 된 회화나무 입니다.의왕의 보호수 경기-의왕-3과 경기-의왕-5입니다.

오래된 나무에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요.중종반정 당시 공을 세운 김우증이 심은 이 은행나무를 중심으로 사방 10리를 사패지로 받았습니다. 이후 나뭇가지가 뚝 부러지면 그 때 마다 정승이 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은행나무의 싹이 위에서 부터 피면 마을의 위부터 모내기를 하고 아래에서 부터 나면 모내기를 아랫마을에서부터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싹이 조금씩 나는지 한꺼번에 나는지에 따라 풍흉을 점쳤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한 달에 한 번 공연이 열리는 야외무대가 있는 천변을 지나 멀리 보이는 산이 백운산입니다. 서현교를 지나고 있습니다.

이 고개가 서현인데요. 한자로 글 서, 고개 현입니다. 서당현이라고도 불러 이 곳에 서당이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고개를 넘어가니 넓고 아늑한 공간이 나옵니다. 흙길을 걸으며 이야기꾼을 따라갑니다.

서현교 옆에 국궁장 표시가 되어있었는데, 지나치기만 했었습니다. 실제 국궁장을 보니 호기심이 일어 들어가 보았습니다. 100m가 넘어 보이는데, 너무 먼 건 아닌가 생각했는데, 145m, 대략 150걸음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다양한 화살이 있는 것도 신기했습니다.

답사팀이 기대에 찬 눈길을 보내자 시범을 보여주셨어요.

145m 거리의 과녁을 향해 화살이 날아가는데 제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명중하면 멀리에서 불이 들어옵니다. 

좀 더 빠른 길을 찾아 풀을 헤치고 간 곳은 기와 가마터로 추정되는 곳이었습니다. 저 까만색덩어리는 돌이 아닙니다. 가마에서 굽다보면 나오는 슬러그라고 하는 찌꺼기입니다. 농사를 위해 돌담을 쌓으면서 주변에 있는 돌과 기와조각, 그리고 슬러그를 이용했습니다. 총 6개의 가마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터를 찾을 수 없습니다.

이 큰 비석은 김유신도비입니다.

김유초상화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경기도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송시열, 박새채 등 노론 영수의 인정을 받은 문인으로 아들의 벼슬이 올라가면서 사후추증되었습니다.

그의 아들은 김취로, 김약로, 김상로인데 최근에 모두 묘를 이장해서 아버지와 함께 모셔져 있습니다.

검재 김유의 묘소입니다.

곡장은 과천에서 옮겨온 김약로의 묘에 있던 것을 이용했습니다.

또 다른 신도비를 찾으셨나요?

이 마을에는 총 4개의 신도비가 있었습니다. 그 중 3개가 남아 있는데, 김우증, 김징, 김유의 신도비입니다. 김동헌의 신도비는 후손들이 모셔갔다고 하네요.

1753년에 김유의 신도비가 세워지고 10여년이 흐른 후 1764년에 김우증의 신도비가 건립되었습니다.

청평사의 모습입니다. 입향조는 김우증은 사후 1742년에 병조판서에 증직되었고 이후 청평군에 추증되었습니다. 

대대로 검약을 중시했던 가문으로 제사를 지내는 음식도 모두 정해두었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 김유는 부인과 자녀에게 비단옷을 입지 말라고  일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며느리가 들어오면서 시아버지의 비단옷을 준비한 겁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 번 고민해보시기 바랍니다.

전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습니다.

주변 소나무와 어울려 좋은 풍광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도비의 지붕이 참 아름답게 조각되어있지요?

정방형의 신도비도 독특하지만 지붕조각으로 인해 더욱 돋보입니다.

백운사 입구 산신당을 마지막으로 백운산의 시원한 계곡물이 흐르는 왕곡천을 따라 내려갑니다.

예상했던 2시간 30분을 조금 넘겼으니 이제 배가 고파질 시간입니다. 메밀국수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함께 만보를 걸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 많은 이야기를 짧은 글에 모두 담지 못해 아쉬운 이야기꾼 박철하와 함께하는 의왕의 마을이야기, 길 이야기는 다음 달에도 계속됩니다.

 

가까운 우리 동네 이야기를 찾아갑니다.

저작권자 © 미디어피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