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읽기 마혜경 카페에 자주 가는 편이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카페에서 멍때리기도 하지만 자투리 시간에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며 보내는 경우가 더 많다. 카페에 발을 들였다면 제일 먼저 사람들의 수다가 섞여서 귀에 소음으로 들어오기 전에 이어폰을 꽂아야 한다. 잡다한 소음에는 음악이라는 지우개가 제격이다. 카운터에서 커피를 주문하고 자리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몰입한다. 소설 읽기에 적당한 조도와 멀리 보이는 초록 나무가 페이지를 하나둘 넘겨준다. '혼자'를 즐기기에 좋은 공간, 푹신한 의자와 한몸이 되었다면 일어서기 힘들다. 그러나
인생수업료 / 김주선 죽고 싶지만 죽을 수 없는 운명의 도깨비와 기억상실증 저승사자가 매력을 뚝뚝 흘리며 TV 화면을 가득 채웠던 2017년 봄, 금요일이었다. 그날 밤, 큰아들은 늦은 귀가를 했다. 나는 거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재방송 드라마 《도깨비》를 몰아보던 중이었고, 남편은 맥주 안주로 북어포 살을 발라내던 중이었다. 서울북부지방법원의 소인이 찍힌 봉투 하나가 아들의 안주머니에서 툭, 떨어질 때 내 심장도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입대 날짜를 받아놓고 마음을 잡지 못해 방황할 무렵, 아들은 아프리카TV에서 진행하는 ‘여자도
싸가지 신랑 /김 주 선 더위가 한풀 꺾였는지 꿀잠을 잤다. 잠결에 홑껍데기 이불을 끌어다 덮을 정도로 제법 선선했다. 주말인데도 남편은 출장을 가는지 새벽부터 커피 텀블러에 얼음 채우는 소리가 들렸다. 요깃거리라도 챙겨줄까 하다가 모르는 척했다.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라 우리는 맞벌이 부부고 그이가 아내의 잠을 깨우지 않으려는 배려로 티스푼 젓는 동작 하나도 살살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를 ‘싸가지 신랑’이라고 휴대전화에 저장한 지도 십 오륙 년이 넘었다. 그 사람 휴대전화에 나는 ‘집사람’으로 뜨는데 말이다. 언젠가 남편에게
노트- NO. 3 / 김주선 그동안 강산이 변해도 네 번은 변했을 텐데, 기억도 가뭇한 노트가 택배로 왔다. 좀 벌레가 오줌을 지린 듯 얼룩이 많은 사륙배판 크기의 대학 노트였다. 나의 청춘에 묻은 얼룩인 양 창피해서 얼른 감추었다. 그리고 두어 달이 지났을까. 모처럼 마음먹고 책상에 앉아 자물쇠가 걸린 일기장을 열듯 내 청춘 노트를 다시 펼쳤다. 서러운 장구 소리 / 육신의 뼈마디가 결리는 / 애달픈 몸짓 // 피의 아픔이 터져 / 넋 잃은 수천 개의 눈동자가 / 집시의 얼굴을 뒤진다 // 타오르는 젊음의 / 흩어진 머리채 //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린 연예인과 유명인들이 자기만의 공간을 찾아서 해방의 시간을 즐기는 관찰 예능 프로그램이 있다. 그들은 가족과 잠시 떨어져 오직 나만의 시간을 보내는데, 전직 농구선수 허재 감독이 피아노 학원을 방문해서 피아노를 배우는 모습이 소개된 적이 있다.어린아이들 옆에 커다란 50대의 남자가 앉아 음악 공책에 음표를 그리고 악보 읽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드디어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는 건반에 꽉 차는 커다란 손가락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올려놓고 한 음 한 음 건반을 눌렀다. 서툴고 거칠지만 그가 누르는 건반들이 소리
그 남자의 오브제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김주선 사내(社內) 남자 화장실에 있는 소변기가 고장 나 설비기사를 불렀다. 부품을 교체하고 센서 감지기가 잘 작동하는지 확인하고 수선비를 지급했다. 주르륵 물이 흘러내리자 그동안 막혀있던 관이 뻥 뚫린 듯 시원하게 씻겨 내려갔다. 누런 때도 벗겨지고 지린내도 나지 않아 속이 다 시원했다. 성역이나 다름없는 곳을 몰래 훔쳐보는 재미랄까. 오래전에 10유로 이상 되는 입장료를 내고 본 미술관이 생각이 났다. 아마 십 오륙 년은 지난 일일 것이다. 독일에 사는 친구와 단둘이 유럽을 여행하게
연당연화(煙堂煙花) / 김주선 예닐곱 살쯤, 나는 담배꽃을 처음 보았다. 내 키만 한 줄기에 넙적넙적한 잎이 어긋나기로 자랐다. 나팔꽃 같기도 하고 분꽃 같기도 한 길쭉길쭉한 꽃이 우산대처럼 핀 모습이었다. 꼭지를 따 쪽쪽 빨아먹으면 벌들도 좋아할 달곰한 맛이 났다. 짓궂은 애들은 담배꽃 무덤에 둘러앉아 담배 피우는 흉내를 내며 놀았다. 나도 엄마 몰래 꽃을 따 입에 물어보기도 했다. 한여름 연초 밭에 꽃이 피면 일꾼들의 손이 바빠졌다. 예쁜 꽃구경은 사치인 양 가차 없이 꽃대를 베어내 꽃무덤을 만들었다. 서둘러 잘라내지 않으면 영
‘이이제이(以夷制夷)’로 서역 경략 반초는 서역으로 가는 길목의 소륵국·우전국 등을 우군으로 만들어 그들의 군사를 마름대로 부릴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건초 3년(서기 78년) 소륵국과 우전국의 병사들을 징발하여 인근에 있는 고묵국(姑墨國)의 석성(石城)을 쳐서 승리로 이끌었다.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하는’ 이른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법을 구사하였던 것이다.이러한 전법으로 자신감을 얻자, 반초는 마침내 황제에게 서역의 여러 나라를 평정하려고 하니 군사를 보내달라는 장계를 올렸다. 후한의 황제 장제는 흔쾌히 그의 청을 받아들여 1
또 봄이다. 또 그림이다. 봄도 설레고 그림도 설렌다. 제11회 부산국제화랑아트페어를 기대하며. 부산 벡스코 제1전시장 283홀에서 4월 8일부터 10일까지다.여전히 수작들인 B-5 갤러리 봄 부스가 기다려진다. 양정진의 산책나온 펭귄가족들이 귀엽다. 제목은 LOVE2(펭귄가족)이며 65.1x50cm, woodcut, acrylic on wood, 2022 신작이다.One moment in time 이미근 작가 작품 제목이다. 45.5x53cm, oil on canvas, 2021제작이고 150만 원이다. 동백꽃 휘날리며~~우리 앉
그녀의 뜰에 핀 무궁화는 / 김주선 고등학교 졸업식도 못 치르고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이민 간 친구가 있다. 곱슬머리에 주근깨가 많고 사리에 밝은 영민한 친구였다. 오 년 전이었을까. 집 근처 농장에서 무궁화(Rose of Sharon) 묘목을 샀다며 현관 출입구 왼쪽 화단에 심은 사진을 SNS에 올렸다. 잘 자랄지 걱정을 하더니 해마다 꽃나무의 성장기를 알려왔다. 작년 여름에는 백송이 넘게 피었다며 분홍색으로 활짝 핀 무궁화꽃 소식을 전했다. 한국에서 자라는 것처럼 나무가 크진 않지만, 근성이 있는 꽃나무라 낯가리지 않고 잘 자라
오지 않을 고향의 봄 / 김 주 선 몇 해 전 기록적인 가뭄이 든 적이 있었다. 수몰되었던 남한강 주변 마을 터가 유적지처럼 모습을 드러낸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왔다. 집터와 돌담이 쌓였던 흔적, 깨진 옹기들, 수백 년은 자랐을 것 같은 당산목의 그루터기까지 적나라하게 모습이 드러난 사진이었다. 거북이 등껍질처럼 쩍쩍 갈라지는 강바닥에서 수풀이 자라난 모습은 기상이변이 나은 생경한 풍경이었다. 누군가는 수석을 주워가고 또 누군가는 집터 흙을 한 삽 퍼갔다는 사연마저 들렸다.제천에서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 충주다목적댐 건설로 청풍면의 거
“호랑이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라” 《후한서(後漢書)》〈서역전〉에는 ‘서역삼절삼통(西域三絶三通)’이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후한을 세운 광무제(光武帝, 서기 25~56년) 때부터 안제(安帝, 서기 106~125년) 때까지 약 1백 년에 이르는 동안 서역과 세 번 단절되었다가 세 번 개통된 일을 지칭하는 말이다. 후한 초기에 흉노는 북흉노와 남흉노로 갈라져 서로 상반된 길을 가고 있었다. 대체적으로 남흉노는 후한에 대하여 종속적 관계를 취하였지만, 북흉노는 시시때때로 후한을 공격하여 결과적으로 서역과의 교류를 막는 방해꾼 노릇
서울아트페어가 인터콘티넨탈 코엑스에서 열린다. 삼성역에 있는 기존 호텔이 아니라 봉은사역에 가까운 새로 생긴 인터콘티넨탈 코엑스 호텔이다. 위 VIP티켓 사진을 찍어가면 50호 이상 큰 그림 전부가 20% 전 부스에서 할인이다.위 티켓을 찍어가면 입장료가 무료이다.갤러리 봄 작가들 작품들이 단연 뛰어나다. 많은 아트페어를 가 봤지만 저토록 퀄리티가 높고 가격이 적절하고 색감이 뛰어난 작품이 없다. 다른 부스가 아닌 갤러리 봄 부스에서만 필자 이름을 대거나 기사보고 왔다고 하면 모든 작품 10% 할인이다. 물론 50호 이상 작품은 더
방송인 김태균 님 수필이다. 재밌을까 해서 찾아봤는데 진지한 내용이라 글이 알차 보여 샀다. 내 돈 내 산. 글이 막힘이 없고 자연스럽고 수려하다. 지나친 묘사와 억지로 꾸민 현학적 문구도 없어 잘 쓴 글이다. 우리 아버지도 월남전 가고 중령 제대하셨는데 비슷한 부분이 많다. 아버지는 정보 쪽에 있었는데 전쟁 가서 전투 한 번도 안 해보셨다. 항공기만 타고 사진 찍느라. 덕분에 많은 군인들을 살려 무공훈장을 타셨다. 보훈처가 황당하다. 태균 님 아버님은 같은 병으로 돌아가시지 않아 보훈 대상자가 아니었다고. 아마 고엽제 때문에 암이
고스케 안에 있던 어떤 끈이 뚝 소리 내며 끊겼다. 아마도 그건 아버지 어머니와 맞닿아 있기를 바라는 마지막 마음의 끈일 터였다. 그것이 뚝 끊겼다.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 나오는 말이다. 사업에 실패한 가족과 야반도주한 아들 고스케가 아버지에게 느꼈던 끊어진 마음의 끈이다. 아들에게 동의도 구하지 않고 강물로 차를 몰고 갈 심산이었던 부모였다.컬트 삼총사가 해체된 게 궁금했다. 그저 한 사람이 너무 뛰어나서 팀을 떠났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은 실제로 해체된 후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더 친했던 두 사람의 뒷담화
백사의 꿈 / 김 주 선 용 두 마리가 승천했다는 영월 쌍용리는 농업이 주업일 만큼 비옥한 땅이었다. 38번 국도변 일대는 석회암 지대여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석회동굴이 많았다. 1962년 비옥한 농경 지대에 시멘트를 생산하는 양회공장이 들어서고, 70년대 건설 붐이 일자 광산업자들이 마을 땅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외지 사람이 몰려 지역경제가 살아나자 인구가 늘었고, 무엇보다 중학교가 생겼다. 돈이 돌고 삶이 기름질수록 사람들은 욕심이 늘어갔고 더불어 몸에 좋다는 음식이라면 뭐든지 갈구했다. 그 무렵, 이웃에 뱀집이 이사를 왔다.
책소개독자의 시각과 취향 모두 만족시킬 예술성과 문학성 뛰어난 수필 60편2022년 수필문단에서 주목해야 할 빛나는 수필가들의 수필 60편을 만날 수 있는 『The 수필, 2022 빛나는 수필가 60』이 출간되었다.이혜연 선정위원은 「발간사」에서 “『The 수필 2022』의 작품 선정에는 기존의 블라인드 방식 외에 선정위원이 추천한 작품에 자기 점수를 매기지 않는 채점 방식을 추가해보았다. 조금이라도 더 공정한 평가를 하기 위해서였다. 심사를 거듭할수록 심사하기가 어려워진다. 공정이라고는 했지만, 위원 각자의 시각과 취향이 다르니
엄마의 무두질 /김 주 선 엄마는 갈걷이 후 뒷설거지하러 들에 갔는지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빈집이었다. 뒤꼍 우물에 가서 물 한 바가지 퍼마시고 돌아서려는데 커다란 고무 물통에 담긴 물체를 보고 기겁했다. 역한 비린내가 나는 담요 모양의 털 껍데기였다. 얼마나 놀랐는지 우물에 자빠질 뻔했다.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을 마신 듯 비위가 상했다. 학교에서 집까지의 거리는 오리(五里)가 넘어 어린 걸음으로 삽 십여 분 이상 걸렸다. 도중에 도축장이 있었다. 새마을 운동 후에는 다른 곳으로 이전해 문을 닫았지만, 빈 건물 앞을 지나다닐 때면
K-굿 / 김주선 독일 뒤셀도르프에 사는 친구에게 한국의 ‘굿’ 열풍을 들은 건 이삼십 년 전이었다. 사실 믿기지는 않았다. 베를린에서 진혼굿을 하는 김금화 소식을 들었을 때는 편견이 심해 남의 나라까지 가서 왜 저러나 싶어 심드렁했다. 무엇보다 기독교인이었고 미신이라고 터부시할 때라 별 관심이 없기도 했는데 오히려 독일인 친구들이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신비한 무녀 비단 꽃(금화)에 열광했단다. 에너지가 폭발하는 매력적인 무속 의식에 푹 빠져 한국으로 유학 온 학생도 있었는데 관련 자료가 컨테이너 한 대 분량이라며 그 열의를 놀
인권의 기본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인데 가해자 편을 들면서 인권을 갖다 붙이는 건 인권이 아니다. 인권중독, 인권영웅주의에 걸리면 안 된다. 인권폭력이 될 수 있다. 탁상공론 내로남불 추상적 인권만 옹호하고 구체적 실제적 사례적 인권은 외면하는 표리부동에는 진정성이 없다. 인권 수업을 듣는데 죄짓는 애들에 대해 뭐라했더니 그러면 안 된다, 잘못된 생각이다, 싸잡아서 그러지 말라해서 너무나 인권 강조하기에 감동받아 그런 학생을 좀 대화라도 해 주시라 했다. 그렇게 인권 얘기를 하면서 학생이 감옥갈 상황이면 누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