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29. 지하철에서.지하철을 타고 가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있는데 내 앞에 중년 이상의 백발이 성성한 분께서 서셨다. 나는 보통의 80년대생으로 커서 도덕적인 의무감에 일어나 자리를 내어 드렸다. 그런데 할저씨께서 본인이 앉으시지 않으시고 멀리 뒤쪽에 누군가를 불러서 앉히셨다. 아마도 부인이신 것 같았다. 내 눈엔 앉으셔야 할 분이 할아버지라고 생각했다. 더 노쇠한 다리로 서 계셨고 그래서인지 더 지긋하다고 여겼나 보다. 여하튼 아주머니께서 앉으셨다. 할저씨께서 연로해 보이셔서 딸을 앉힌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딸을
2022. 12.03. 16:23.내 삶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한 주를 꼽으라면 바로 11월 셋째 주인 저번 주, 대략 10일가량 된다. 태희형과 하는 장편 . 작가였으며 이제는 연출 공부를 하고 있는 김정진 감독 , 부산대 , 숭실대 , 하비프러너 , ..
나뭇잎 가리개 / 김주선 프라하의 어느 길거리에서 소년 조각상의 성기를 움켜쥔 여인의 사진 한 장이 단톡방에 도착했다. 여행 중인 친구가 보내온 사진이었다. 설거지도 쌓아둔 채 아침드라마를 챙겨보던 여인들이 일제히 단톡방으로 모여들었다. 조각가 ‘밀로스 젯(Miloš Zet)’의 「청년(Youth)」이라는 작품이라는데 ‘프란츠 카프카’의 소년 시절의 모습이라는 둥 다녀온 사람마다 분분했다. 오래전부터 유럽에서는 내로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조각상을 만들어 세우는 게 유행인 시절이 있었다. 관공서든 대학교든 길거리든 어디를 가나 흔하게
2022.10.31. 16:04.애도하는 마음, 글 쓰기에 앞서.2022.10.29. 이태원에서 발생한 가슴 아픈 일에 진심으로 애도합니다. 핼러윈이 뭔지도 잘 모르는 나에게 핼러윈 분장이라든가 축제는 아주 낯선 일이다. 나는 동료들의 공연을 보는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고 TV에 나오는 뉴스를 보며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언뜻 들었던 '사상자'라는 단어를 어린 친구들이 잘 모르고 쓰나 보다 하면서 지하철을 타고 왔었다. 차라리 그게 다행일 일이다. 그 단어는 사실이었고 허망하다는 생각이 밤의 시간을 가득 채워버렸다. 인생이.
가을의 정취. 내 가을에는 요 몇 년간 어떤 정취가 있다. 서른이 넘어서 매년 가을 정도에 작거나 큰 공연을 준비한다. 못했던 해도 있었지만 하려고 노력한다. 그 이유는 내가 연극을 보면서 연기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의 근본적인 이유를 찾는 행동이다. 그래서 연습실에 연습하러 가는 길이 항상 가을이었다. 가을은 하늘이 현기증이 나게 퍼렇다. 파랗다고 하기에는 그 깊이감이 아주 대단해서 퍼렇다. 구름도 적다. 구름을 한 번도 흠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지만 시월의 하늘에는 없어도 될 것 같다. 구름 하나
2022.10.18.01:16.나는 꽃이라 했고 너는 나무라 했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서 공기 좋은 곳으로 가서 커피를 마셨다. 하늘이 맑기도 너무나 맑은 10월의 어느 날이다. 나는 그곳에 가면 해가 지는 것을 멋지게 볼 수 있다며 권했다. 기와 넘어서 낙조가 멋질 것 같은 곳에 자리를 잡고 사소한 얘기를 했다. 난 요즘 소금 빵을 좋아해. 그래서 지나가는 빵집마다 들러서 소금 빵을 먹어. 그래? 나도 그런데, 여기는 명장이 하는 곳이니 먹고 어떤지 말해보자. 겉은 먹기 좋게 단단하고 속은 보들 하네. 그렇지? 너무 달지도 짜지
2022. 10. 10. 11:42 요즘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한 음절이다. 꽃, 책, 차 (커피), 비, 물론 '몸'과 '맘'도 있다. 그러고 보니 한 음절로 된, 좋아했던 것이 참 많다. 일(노동), 극(Drama), 시(詩), 물(water), 비, 눈, 코, 입 널 만지던 내 손길 작은 손톱까지 다아하하...... 왜 그런 노래가 나왔는지 알겠다. 짧아서 강렬하고 길지 않아서 지저분하지 않다. 한 음절은 단순함의 묘미가 있다. 그 단순함이 좋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건 단순한 것이다. 이를테면, '나'도 한 음절이다. '너'도
2022.10.05.01:36.감정은 동쪽에서 떴다가 서쪽으로 사라졌다. 눈을 뜨고 엄습하는 분위기가 있다. '오늘은 기분이 좋지 않을 것' 생체에서 보내는 신호가 있다. 어떤 계기도 없이 그런 날이 있다. 그래서 나는 호르몬의 노예임을 빨리 자각한다. 제아무리 정신력으로 이겨내려 애써도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강한 우울감이 있다. 그렇게 정신력이 강하면 총 맞고도 살아보라지. 그런 날이었다. 해가 뜸과 동시에 우울감이 격정적인 날. 다른 곳에 집중하려고 애써 책을 읽었다. 마치 다른 세상에 있다는 듯이 작가의 공간을 유영하면서 현실의
2022.09.26. 11:22반듯한 것을 좋아하는 중.짤막한 퍼포먼스를 마쳤다. 대학로 4차선 도로를 막아두고 춤과 액션 퍼포먼스를 선후배 동료분들과 무사히 마쳤다. 축축할 정도로 취하고 간밤에 소회를 끄적이다가 참 좋은 경험을 했구나 생각한다. 각 집단의 다양성을 갖춘 특색과 개인의 특색까지 더하면 15인의 배우는 단 한 구석도 비슷하지 않을 정도로 개성 있었다. 나라는 존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가 되어야지, 다양하고 유연해야지.' 같은 생각을 하며 지내왔지만 과연 이 사람들보다 능청스러울 수 있을까.
2022.09.16.22:31.비 오는 날은 기분이 좋다. 오랜만에 촬영을 하면서 밖엔 비가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산이 없어서 어쩌나 하는 동료 앞에서 미안하여 표정을 감췄지만 기분이 좋았다. 비가 내리는 상상을 하니 시원하겠구나 싶었다. 운전을 하며 오는 길에 비가 오는 게 왜 좋은지 생각해봤다. 그동안은 비 오는 게 좋았던 이유를, 시원해서 좋다고 생각했다. 그 말로는 내 심상을 다하기에 아쉬웠다. 그래서 오늘 일만 놓고 봤더니 오늘의 비는 좀 다르게 느껴진다. 오랜만에 하는 촬영과 신이 난 나의 기분이 더욱 나를 즐겁
2022.09.04.20:20 열병이 태우고 간 자리. 집에 오자마자 거의 기절하다시피 자리에 누웠다. 어떻게 집에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운전하며 졸며 허벅지를 쳐가며 왔다. 겨우 정신을 차려보니 베개와 이불이 흠뻑 젖어있다. 열병을 앓아서 나오는 땀 때문이다. 이마에 손등을 얹어 보니 뜨끈하다. 밤새 진통제와 해열제를 삼키면서 씨름하다가 날이 밝은 창밖을 보면서야 깊게 잠을 잘 수 있었다. 열이 어느 정도 내리니 지난밤을 생각할 여유가 있었다. 간밤에 온몸을 적시는 땀을 뿜어대는 순간에도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나는 갖고 싶은
2022.08.26.00:30아낀다는 건. 아끼는 마음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애틋함을 자아낸다. 그래서 나도 무언가를 아끼는 것이 있으면 좋겠구나 생각한다. 며칠 만에 집에 들어왔다. 이제는 익숙한 광경인, 아버지가 어머니 팔다리를 주무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아버지도 피곤하실 텐데 고생하신다는 생각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력도 좋으시다 생각했다. 씻는 걸 좋아하는 난데도 너무 지치는 날이라 소파에 앉아서 강아지를 쓰다듬는다. 아버지와 나는 피곤한데도 무엇을 하고 있었다. 강아지와 어머니를 비교하는 것은 좀 이상하지만, 아
2022.08.14. 23:54볼이 닿았던 기억. 일요일 아침밥을 먹고 TV를 본다. 101세 연로하신 할머니의 부지런하신 일상을 보고 감탄하며 부모님과 관람하고 있었다. 매일 같이 불경을 읽으신다며 불경을 훑어 넘기다가 한 사진이 끼어있는 장을 보고 멈추신다. 그리곤 책에 얼굴을 묻으시고, 부비적 하신다. 제작진이 그게 뭐냐고 묻자, 돌아가신 남편과 찍은 사진이라고 하셨다. 그 모습이 정말 사랑했던 기억을 기억해내는 할머님만의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옷감도, 사용감이 있던 도구도 아니라 두 분이 나란히 서계신 사진이었다. 그렇
2022.08.11.19:50.자극적인 것들이 이젠 자극적이지 않아 졌다.어느 날 내 생활을 돌아보니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강아지와 놀다가 꽃을 보고 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밤새 놀아주던 재미난 것들은 이제 재미가 없어지고 순한 것들만 좋다. 자극은 감각기관으로부터 들어온다. 눈, 귀, 코, 입, 피부로 들어와서 머리로 간다. 그리고 어떤 생각을 만든다. 자극적이라는 건 그러니까, 더 큰 충동을 만드는 것이다. 아름다운 걸 '보고 싶다'가 '갖고 싶다'로 변하는 것처럼. 그런 의미에서 나는 꽤나 순해진 감각을 선호하는 요즘이다.
2022.08.07. 23:39.날이 너무 덥다. 더워도 너무 덥다. 땀이 많은 편이라 땀을 흘리려 운동을 가진 않지만, 최대한 덜 덥게 운동하는 걸 좋아해서, 여하튼 운동을 갔다. 너무 더워서 시원하게 입었음에도 흐르는 땀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큰 선풍기 근처에 앉아서 가져온 얼음물을 마시며 생각해본다. 이렇게 땀을 많이 흘리면 근손실이 오진 않을까. 매일 운동하는 것보다는 이틀에 한 번이 좋다던데. 나는 지금 너무 무리하는 것이 아닐까. 땀이 다 식어가고 운동할 마음이 다시 듣기 시작하며 인클라인에 앉아서 나를 봤다. 만
돌아온 아저씨/ 김주선 “전쟁이 끝나가는 어느 봄이었어.” 엄마의 이야기는 늘 그렇게 시작되었다. 대여섯 명의 북한군이 집 안마당까지 왔더란다. 깊은 산속에 숨어 살다가 배가 고파 민가까지 내려왔던 모양이었다. 총구를 겨누거나 공포를 주지는 않았으나 며칠 굶은 애들 마냥 꼬질꼬질한 얼굴이 참 애처로워 보였다고 했다. 배고프다고 먹을 것 좀 내놓으라길래 봄에 캔 감자를 보리밥에 넣고 밥을 해줬더니 맛있게 잘도 먹었단다. 밥 짓는 동안 마당에서 아이들과 자치기 놀이를 하며 노는 북한군을 보니 영락없는 자식 또래의 애들이었다며 이야기를
깔따구가 돌아왔다/김주선 밥 한술 뜨고는 잠이 들었다. 설핏 잠에서 깨어보니 남서향 커튼 틈으로 빛이 들어와 칼날처럼 침대 깊숙이 찌르고 있었다. 해시계는 오후 3시쯤, 암막(暗幕)을 활짝 열어젖히고 빛을 따라 아른거리는 먼지를 가만 보았다.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요 며칠 눈앞에서 성가시게 굴던 날벌레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실눈을 떠야 할 만큼 눈이 부셨다. 여전히 동공은 열려있고 눈알이 빨갛다.오전에는 월차를 내고 안과에 다녀왔다. 비문증(날파리증)이라니, 참 가지가지 했다. 유리체를 혼탁하게 하는 뿌연 부유물을 들여다보기 위해
2022.08.03.16:21.筆寫 필사하는 마음은 뭘까. 요즘 자꾸 생각나는 단어다. 작품 때문에 모르는 배우와 앉아 서로 취미를 묻다가 서로 글을 쓰는 걸 좋아하는 걸 알게 됐다. 그분은 필사 모임을 갖는다고 하셨다. 좋은 글이나 어떤 문학을 쓰는 일을 필사라 한다. 베껴 쓴다는 것이다. 학창 시절 선생님께서 암기하라고, 체벌로써 주시던 행위. 나도 가끔 좋은 시를 보면 어딘가에 담아두고 싶다. 그래서 선생님께서 그 당시 쓰라고 했던 시를 다시 노트에 적어본다. 이제는 누가 쓰라 강요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구름에 달 가듯 가는
2022.01.21.01:59.사랑하라는 말이 지겹다. 지겹다는 강정이 느껴지며 지리멸렬한 명령 같다. 친구를 종료들을 만나면 가장 흔히 하는 말이 여자 친구 있느냐는, 왜 안 만나냐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딱히 할 변경이 없기에 '응 나는 눈이 높잖아. 그래서 사람이 없네.' 한다. 이상형을 물어보기에 가만 생각해봤다. 그리고 답하길 '귀여운 사람!!!' 모임은 순식간에 토론장이 되고 귀여움의 기준을 논한다. 나는 부족한 것들을 보면 귀엽다. 귀엽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제 스스로 혼자이지 못 할 때에 부족하고 귀엽다. 동물의 새끼
2022.07.23. 02:46.눈앞에 사람이 지나가고 좋은 향기가 났다. 나는 코가 예민한 편이라 다양한 냄새와 향기를 맡으며 이런저런 공상을 하곤 한다. 그건 특이하게도 자잘한 원소기호일 뿐인데 콧속으로 들어가면 생각이 된다. 그 생각은 기억이기도 하고 사람에 대한 이미지이기도, 감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주 악취가 아니라면 대부분 즐거운 일로 다가온다. 재미난 생각을 하게 되니까 말이다.계절에 대한 냄새와 기억들은 워낙 자주 생각하는 일이라 다른 생각을 해봤다. 저 사람은 무슨 샴푸를 쓴 걸까, 무슨 향수를 쓴 걸까. 하는 생